"그러구 끝이 났네그려. 잘되었네. 아주 잘되었네. " 이때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
던 손가가 “첫날 잘 치른 사람은 전에두 더러 있었답디다. 장기를 잘 두니까
내일은 걱정없지만 끝날이 아무래두 탈이오. 남의 집 다락 세간 그중에 집안 사
람두 못 보게 잠가놓은 궤짝 속에 든 물건을 무슨 수루 알아낸담. " 하고 말하니
객주 주인은 ”내일두 쉽지 않소. 장기란 게 비기기가 쉽다는데 꼭 이겨야지 비
겨두 못쓴다우. 총각이 아무리 장기를 잘 두더래두 국수장기를 이기기가 어디
쉽소. " 하고 손가 말에 운을 달고 오가 마누라가 "하늘이 정해 놓은 연분이면
절로 다 되겠지. “ 하고 말하니 유복이는 "암 그렇지요. " 하고 오가 마누라 말
에 운을 달았다. 유복이가 천왕동이를 보고 "우리가 내일 약수산 약물을 먹으러
갈 텐데 장기 취재가 일찍 끝나거든 자네두 같이 가세. " 하고 말하니 천왕동이
가 "나는 약물 고만 먹을라우. 될 수 있으면 내일 종일 이방하구 장기를 두어볼
생각이오. " 하고 대답하였다.
이방의 안해가 골이 좀 풀려서 이방과 말을 하게까지 되었다. 이방이 조사 보
러 들어가기 전에 조반 요기를 하면서 "오늘 조사가 좀 늦을는지 모르니 나 오
기 전에 사위 취재 보러 오는 총각이 오거든 내 방에 들여앉혀 두게. " 하고 말
을 이르니 그 안해가 "그러리다. " 하고 대답하였다. 그날 조사가 과연 늦었다.
늦은 아침때가 다 되도록 이방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방의 안해가 모녀 겸상
하여 아침밥을 먼저 먹는 중에 바깥 심부름꾼이 안에 들어와서 이방의 안해를
보고 "취재 보러 온 총각이 밖에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갔다 다시 오랄까요? "
하고 물었다. "그 총각이 어제 왔던 총각이던가? " “어제 와서 오래 있다 간 총
각이에요. " "바깥방에 들여앉혀 두게. " "안 기신 방에 들여앉혔다가 걱정이나
안 날까요? " "걱정 말고 들여앉히게. " 심부름꾼이 나간 뒤에 이방의 안해는 아
침밥을 얼른 먹어치우고 바깥방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되창문에 가서 문을 빠끔
히 열고 총각의 외모를 한동안 들여다본 뒤에 바깥 심부름꾼을 불러들였다. "총
각이 혼자 앉아 심심치 않겠나, 자네 윗목에 가서 좀 같이 앉았게그려. " "녜, 그
리하겠습니다. " "그 총각이 어디 있다던가? ” "타관에서 온 사람이에요. " "글
쎄 여기 와서 어디 있는가 말이야? " "객주에서 묵겠지요. " "어느 객주? “ "몰
라요. " "물어보게. " ”녜. “ 심부름꾼이 바깥방으로 나간 뒤에 얼마 동안 안
지나서 이방이 관가에서 나왔다, 이방이 바깥방을 들여다보며 "총각 벌써 왔던
가? 내가 아침밥을 먹구 나을테니 미안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게. " 하고 바로
안으로 들어와서 아침밥을 부지런히 먹었다. 이방이 사랑으로 나오며 곧 심부름
꾼은 밖으로 나갔다. 이방이 윗목에 앉았는 천왕동이를 바라보며 "장기를 두어
볼까. 이리 올라오게. " 하고 말하니 쳔왕동이는 윗목에 있는 장기판과 장기를
들고 가려고 하였다. "그건 거기 놔두구 이리 오게. " 하고 말한 뒤에 이방이 벽
장을 열고 다른 장기판과 장기를 내어 놓는데 판은 가래나무요 장기는 화양목이
었다. 이방과 천왕동이가 마주앉아서 장기를 벌여놓았다. 면 수습이 끝난 뒤에
이방은 자기 둘 수를 보느니보다 천왕동이 두는 수를 보느라고 한참씩 들여다
보았다. 장기가 반 판쯤 되었을 때 이방이 장기판에서 물러나 앉으며 "장기 고만
두세. " 하고 말하였다. "왜요? " "다 둘 것 없이 내가 졌네. 내일 오게. " "될 수
있으면 오늘 종일 장기를 두려구 생각하구 왔는데요. ” "오늘 관가에 일이 있어
서 점심 전에 또 들어갈 테니까 장기 두구 있을 수 없네. " 천왕동이가 하릴없이
겨우 장기 반판 두어보고 객주로 돌아왔다. 동행들은 모두 약수산에 가고 객주
에 없었다. 천왕동이가 동행들 뒤를 따라서 약수산을 가려다가 약물 먹으러 가
느니 낮잠이 나 잔다고 사처방에 혼자 드러누워서 낮잠 한숨을 실컷 자고 일어 났다.
마당에 나와서 해를 치어다보니 점심때가 훨씬 기울었다. 점심 달라기도 겸연쩍으려니
와 배도 고프지 아니하여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려고 나가는 중에 객주 주인이
늙수그레한 여편네 하나와 같이 마주 들어오며 "총각 어디 가우? 이 안손님이
총각을 찾아오셨다우. " 하고 말하였다. "누구신데 날 찾아오셨소? " "잠깐 말씀
할 일인 있어 왔소. 사처방이 있으면 방으로 들어갑시다. " 천왕동이가 낯모르는
여편네를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 여편네가 객주 주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천왕동이는 향하여 "나는 백이방의 안해 되는 사람이오. " 하고 말하여
천왕동이는 깜짝 놀랐다. "요새 우리 집에 취재 보러 오지 않소? " “녜. ” "내
가 일러줄 말이 있소. " "무슨 말씀입니까? " 그 여편네가 천왕동이에게로 가까
이 다가앉아서 입을 거의 귀에 대다시피 하고 한참 소곤소곤 말한 뒤에 총총히
일어서 나갔다.
약수산 갔던 일행이 다 저녁때 돌아왔다, 유복이가 천왕동이를 보고 급한 말
로 "장기가 어떻게 되었나, 이겼나? " 하고 물으니 천왕동이는 "아니. " 하고 고
개를 흔들었다. "못 이겼어? “ "두다 말았소. " "어째서? " "반 판쯤 두다가
고만 두자구 합디다. " "그럼 어떻게 되나. 내일 취재를 마저 보게 한다던가? "
"내일 또 오랍디다. " "그러면 되었네. 반 판은 고사하구 아주 안 두구라두 취재
를 잘 본 셈으루 쳐주면 고만이지. 잘 되었네. " "장기를 실컷 둘라구 갔다가 한
판두 다 못 두구 왔으니 분하지않소. " "분할 거 없네. 이담에 장인이 되거든 실
컷 같이 두지. ” 하고 유복이는 허허 웃었다. 손가가 유복이 다음에 나서서 "이
방 장기가 어떻든가. 반 판쯤 두었드라두 수는 대개 짐작할 수 있겠지. " 하고
물으니 천왕동이가 "대단 세더군. " 하고 대답하였다. “서루 맞둘 장기야? " "
글쎄. ” "우리 동네 노인과는 어떻든가? " "그 장기버덤은 훨씬 세든걸. " "그럼
맞둘 만하겠군, 그런데 어째 두다가 말았을까? " "그건 나두 몰라. " "사윗감이
맘에 드니까 취재를 건정으로 보이는게군. " 오가 마누라가 손가 뒤를 이어서 "
어제 내가 말하지 않든가베. 수작을 길게 할 때 벌써 이방은 사윗감으로 정한
게야. " 하고 말하니 유복이가 "아무리 골라두 저 사람만한 사위를 고르기가 어
렵지. " 하고 오가 마누라와 손가를 돌아보았다.
저녁밥들을 먹은 뒤에 약수산 갔던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섞바꾸어 지
껄이던 끝에 내일은 동선관을 나가 구경하자는 의논이 났다. "내일은 나두 같이
갑시다. " 하고 천왕동이가 말하니 손가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내일 취재는 왜
고만둘 테야? 마저 가보지. " 하고 말하였다. "누가 안 간다구 그러기에. " "동선
관을 같이 가자니까 말이지. " "취재 보구 와선 같이 못 가나. " "내일 취재는 요
행두 바랄 수 없으니까 가기가 맘에 떨떠름할 껄. “ "염려 말아. " "잠근 궤짝
속 물건을 알아내는 수가 무슨 수야? " "혹 알아낼 수 있을는지 누가 아나? ”
"황도령이 당대 이인이신 걸 내가 몰랐구려. " "나를 빈정거리는 모양인가? " "
아니 빈정거리긴 누가 빈정거려. 이인 아니군 알아내지 못할 걸 알아낸다니까
말이지. " "이인은 못 알아내두 나는 알아낼는지 모르지. " "황도령이 히구저치는
군. " "쓸데없는 소리 그만 지껄이게. " 하고 유복이가 손가를 핀잔 주는 바람에
천왕동이까지 입을 다물었다.
오가 마누라는 피곤하여 먼저 누워서 잠이 들고 손가는 봉놋방으로 이야기하
러 나간 뒤에 유복이가 내일 취재의 어려운 것을 걱정하니 천왕동이는 "걱정 마
우. 장가는 들어놓은 게나 다름없소. " 하고 말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믿나? "
"믿는 구석이 있소. " "믿는 구석이 있거든 이야기 좀 하게. " "이야기는 이담에
하리다. " "참말 틀릴 염려 없겠나? " "염려 없소. " "그러기만 하면 내 속이 다
시원하겠네. " "내일 두구 보시우. " ”거기서 만일 혼인을 완정하자구 하면 어
떻게 대답할 텐가? “ "어떻게 대답하다니? " "형님 내외에게 말하구 와서 완정
하겠다구 대답하게. " "누님과 형님에게 말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 아니오. " "말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지만 혼인 같은 큰일을 형님 내외에게 말 안 하구 정하면
자네 맘엔 섭섭지가 않겠나. " "내일 가서 봐가며 뒤를 두구 오리다. " 유복이와
천왕동이는 그 뒤에도 한동안 다른 이야기들을 하다가 자리에 누웠다. 이튿날
식전에 이방은 조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
어치우고 안방에서 안해와 이야기하였다. "총각이 올 때가 되었지? " "어제는 이
만때 전에 왔었던가 보오. " "총각을 보았나? " "어제 문틈으로 내다보았소. " "
사람이 보기에 어떻든가? " "생기가 있어 보입디다. " "그 눈에 조화가 들었지.
눈에서 반딧불 같은 불이 반짝반짝하데. ” "열기가 있습디다. " "가까이 못 봐
서 열기라구 하지만 그게 예사 열기가 아니야. " "그럼 눈 속에 참말 불이 있을
까요? " "그 총각이 백두산 속에서 났다니까 그것이 명산 정기겠지. " "백두산이
어디 있는 산이오? " "함경도와 오랑캐땅 어름에 있는 산이야. " "그 산이 명산
이오? “ ”명산이다뿐인가. 조선 팔도 산의 조종일세. 그 산에는 큰 짐생이 있
어두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네. " "그 산속에도 사람이 사오? " "사는 사람이 있
단 말은 못 들었어. " "그럼 그 총각이 어떻게 그 산속에서 났단 말이오? " "그
총각의 부모가 무인지경 산속에 가서 살았다네. " 바깥 심부름꾼이 괭이 들고 광
채 뒤로 가는 것을 이방이 내다보고 "무얼 하러 가느냐? " 하고 물었다. "돼지우
릿간 시궁을 치러 갑니다. " "그건 지금 안 치면 못 치느냐? " "지금 마침 다른
일이 없습니다. " "고만두구 밖에 나가 있다가 취재 보러 오는 총각이 오거든 곧
데리구 들어오너라. " "총각이 올 때가 지났는걸요. " "올 때가 지나다니? " "어
저께 그저께 다 댁의 아침이 끝나기 전에 왔었습니다. " "오늘은 늦게 오는 게
지, 나가 있거라. " 심부름꾼을 내보내고 이방이 안해를 돌아보며 "늦더래두 오
긴 오겠지. " 하고 말하니 안해가 잠깐 동안 잠자코 있다가 "글쎄요, 오늘 취재
가 어려워서 고만둘라는지 모르지요. " 하고 대답하였다. "사윗감은 좋은데. " "
좋으면 소용 있소? “ "글쎄 말이야. " "객주로 사람이나 좀 보내보시구려. " "객
주두 모르거니와 알더래두 사람까지 보낼 건 없어. 사랑에 나가서 기다려 보지.
" 이방이 사랑으로 나왔다. 천왕동이가 전날 기다리던 대중을 잡고 늦잡도기는
것을 이방은 알 까닭이 없었다. 이방이 여러 차례 방문 밖을 내다보며 고대하는
중에 천왕동이가 심부름꾼을 따라 들어왔다. "오늘은 늦었네그려. ” "녜, 좀 늦
었습니다. " "무슨 일이 있었던가? “ "식전 일찍 일어나서 이때껏 치성을 드리
구 왔습니다. " "치성은 웬일이야? " "오늘 취재야 치성을 안 드리구 보러 올 수
있습니까? ” "치성을 어디다 드렸나? “ 천왕동이는 대답을 않고 싱글싱글 웃
었다. "대답하기 싫은가? " "이 다음 아시지요. " "고만 취재를 시작할까? " "그
리 하시오. " "우리가 사위 취재를 보이려구 용왕께 발원한 뒤 궤짝 몇 개 속에
몇 가지 물건을 너둔 것이 있네. " "들어서 압니다. " "그 궤짝의 갯수와 빛깔부
터 말하구 그 다음에 궤짝에 든 물건들을 차례루 말해 보게. " 천왕동이가 단정
히 앉아서 두 손길을 맞잡았다. 한동안 있다가 외면하고 혼잣말하듯 "흰 궤짝 하
나, 누런 궤짝 하나, 붉은 궤짝 하나 궤짝이 세 개로군요. ” 지껄이고 이방을
바라보며 "그렇습니까? " 하고 물으니 이방은 눈을 똑바로 뜨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었다. 천왕동이가 다시 외면하고 먼저와 같이 "붉은 궤짝에는 붉은 팥이
한 낱, 누런 궤짝에는 누런 콩이 아홉 낱, 흰 궤짝에는 목화가 열두 송이. " 하고
지껄이는 동안에 이방이 말은 고사하고 숨소리도 없이 듣고 만 있다가 천왕동이
입에서 마지막 말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 나서 안문을 박차고 맨발로
뛰어들어가며 "여보게 여보게, 사위를 얻었네. " 하고 큰소리를 질렀다.
천왕동이는 혼인 완정을 뒷날로 미루려고 생각하고 왔었는데 말 한마디 할 사
이 없이 이방이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곧 사위를 얻었다고 뒤설레를 놓으니 이것
이 마음에 마땅치 못하여 열린 되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불쾌스러운 음성으
로 "나 좀 보십시오. 내가 말씀할 게 있습니다. " 하고 이방을 불렀다. 이방이 되
창문 앞에 와서 천왕동이의 눈살 찌푸린 것을 보면서도 눈치를 모르는 것같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의논한 말씀이 있으니 잠깐 들어오시지요. " "무슨 말인
가? 말하게. " "혼인에 대해서 의논할 말씀이 있습니다. " "암, 의논할 말이 있겠
지. 차차 의논하세. " "내가 의논할 말씀은 다른 게 아니라 혼인을 이번에 아주
완정하구 가지 못하겠단 말입니다. " "무엇이 어째? 완정된 혼인을 다시 완정하
지 못하겠다니 무슨 소린가? “ "누가 완정했어요? " "누가 완정하다니, 그게 무
슨 소린가? 자네가 취재만 보구 혼인을 하지 않을 테란 말인가? " "혼인하지
않을 테면 왜 와서 취재를 보겠습니까? ” “그러기에 말이지. " "내가 가서 누
님 내외에게 말하구 다시 와서 완정할랍니다. " "자네 누님 내외가 혼인을 말라
면 말 텐가? " "말랄 리가 없지요. " "여보게, 쓸데없는 잔소리 말구 이리 들어오
게. " 이방이 천왕동이의 손을 잡아끌려고 하였다. "왜 이러십니까? " "장모 될
사람 상면 좀 하게. " "이 다음에 하지요. " "그저 하라는 대루 하게. 이리 들어
오게. " "들어가더래두 신발이나 신어야지요. " "여기 있는 내 신 신게. " "내 신
발을 집어가지구 올 테니 손을 놓으십시오. " "그럼 얼른 집어가지구 오게. " 이
방은 천왕동이의 손을 놓고 자기로 신을 신었다. 이방이 천왕동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며 ”새 손님을 앉히게, 마루에 자리 좀 깔게. " 하고 소리쳐 말하
여 이방의 안해가 심부름하는 계집아이를 불러서 마루에 기직을 깔게 하였다.
이방이 천왕동이를 끌고 마루에 올라와서 자리에 앉힌 뒤에 곧 안방을 향하여 "
어서 이리 나오게. " 하고 안해를 불러내서 천왕동이봐 상면을 시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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