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96

혼불 2권 (28)

"노래를 불러라." 강모는 노비에게 명령하듯 짧게 말했다. 오유끼는 다소곳이 이마를 숙여 절을 하고는 샤미센의 줄을 고른다. 그네의 흰 손가락이 강모의 가슴에 닿는다. 강모 는 머리를 털어낸다. 자완무시와 떡국, 은어 요리들이 어지럽게 상 위에서 뒤섞 이고, 함께 앉은 사람들은 이미 샤미센의 가락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 았다. 그들은 거나한 취기를 옆자리의 젊은 여자에게 부리며 허리를 끌어안고 낄낄거린다. 방안에는 자욱한 담배 연기가 전등 불빛을 가리워 모든 것이 몽롱 하게 보인다. 귀밑에서 들리는 희롱의 소리도 아득하고 멀어, 꿈결인가 저승인가 싶었다. 그런 와중에서 오유끼는 홀로 샤미센을 퉁기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가락을 듣고 있지는 않았다. 그네도 누가 들으라도 하는 것은 아닌 것 ..

혼불 2권 (27)

"모쯔즈끼로 가자." 하고 말할 때는 "새 여자가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는 공공연한 속뜻이 숨겨져 있을 정도였다. 그곳의 주인은 검붉은 일본 남자였 다. 도무지 일본에서 무엇을 하다가 조선까지 건너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 만, 아마도 걸식을 하던 부랑배 아니면 사람 장사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 리기도 했다. "그놈 눈구녁을 좀 보아. 실배암같이 간교하단 말씀이야." "듣고 보니 그렇구만. 그 누루꾸룸안 흰자위에서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걸 나두 봤지." "아무러면 어떤가. 우리한테야 나쁠 게 없잖어? 한 바퀴 그놈이 조선 팔도를 휘 이 돌고 오면, 방방 곡곡에 파묻혀 있던 이쁜 일색들만 걷어오지 않던가배?" "허기는 .굴비 두름이 따로 없더라." 언젠가 그는, 보리쌀 한 말에 젊은 처녀를 사 가지..

혼불 2권 (26)

삼재는 세상을 괴멸하는 불과 물과 바람의 큰 재난으로,화재,수재,풍재를 말한다. 그뿐 아니라, 전쟁 난리 같은 도병재와 전염병이 창궐하는 질역재, 흉년을 당하 여 굶주리는 기근재도 이에 속하여, 참으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운성이 머리 위 에 비치는 것이다. 이 같은 운수가 한번 침노해 들어오면, 그 살마의 만 삼 년 간을 흉화로 어지럽히니 뒤에라야 빠져 나가는데, 전해 오는 말로 "드는 삼재보다 나는 삼재가 더 무섭다." 고들 하는 것을 보면, 삼재 나가는 꼬리가 조용하지 않은 탓이리라. 마치 말발굽 으로 거칠게 뒷발질을 하는 것처럼 후려치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팔난 이라면, 여덟 가지의 재난을 이름이니 곧 배고픔과 모진 추위,심한 더위,성난 불 길,큰 물, 병란,목마름,그리고 칼로 인한 재앙을..

혼불 2권 (25)

13 어둠의 사슬 캄캄한 밤, 검은 냇물이 흐른다. 누르는 어둠에 기가 질린 듯 물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만, 잠잠히 몸을 누이고 있는 물의 수면 위에서 비늘처럼 불빛이 번뜩 인다. 어둠의 인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희미한 달빛인지도 모른다. 잠든 도시의 한쪽에서, 소리를 죽이며 남 모르게 흘러가고 있는 냇물은, 이따금 물결을 뒤채 며 번뜩이는 불빛을 날렵하게 삼켜 버린다. 흡사 순식간에 불빛을 잡아먹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럴 때마다, 강모의 어두운 눈 속에서는 불빛이 떴다가 지곤 하였 다. 방천에 오가는 행인도 끊긴 지 한참이나 되었으니, 짧은 여름 밤이라고는 하 지만 시각은 꽤 깊어진 듯하였다. 방천에 줄지어 늘어선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 지 끄트머리가 귀밑에 메마른 소리를 낸다. 아마 이 버들가지도 ..

혼불 2권 (24)

"강실아. 너 강수형 생각나?" 강모는 어두운 텃밭 담장을 짚고 허수아비를 내려다보는 채로 소리를 죽여 강실 이에게 묻는다. 그네는 고개를 끄덕인다. 퍼드득, 어둠 속에서 손가락만한 누에 나방 한 마리가 강실이의 머리를 차며 날아오른다. 강실이 오르르 어깨를 떤다. 나방이는 허물어진 담을 넘어 종이 등불 쪽으로 날아간다. 등불은 흰 종이술을 가닥가닥으로 늘어뜨리고 있다. 마치 연꼬리를 달고 있는 것도 같은 등불에 나 방이 부딪친다. 등이 소리 없이 흔들린다. 그 아래 신랑과 신부는 술을 마신다. 종이 바른 얼굴의 꽃잎 같은 입술을 기울여 한 모금 한 모금 술을 마시는 신랑 은 강모였다. 그리고 신부는 꽃무지게 에일 듯 아련하게 두른 강실이였다. 강실 이는 혼백보다 더 투명하고 선연하고 아득하였다. 강모는..

혼불 2권 (23)

"강실아." 강실이는 떼던 걸음을 멈춘다. 그네와 강모의 사이를 무거운 정적이 절벽처럼 가로막는다. 그 정적은 모깃불의 연기와 만수향의 잦아드는 듯한 냄새인 것도 같았다. 아니면 캄캄한 밤 하늘을 가르며 흐르는 은하수의 물결이었는지도 모른 다. 그래서 강실이는 멀고 멀어 보였다. 손을 뻗쳐도 닿을 리 없고, 소리쳐 불러 도 들릴 리 없는 곳에 스러질 듯 그네는 서 있는 것이다. (아아, 내 너를 한 번 보기만 하였으면, 그러면 원이 없을 것만 같더니, 내가 부르는 소리가 너한테까 지 들리었더냐. 네가 어찌 알고 거기서 있는가. 이리 와, 강실아, 이리... 와...) 그 러나 강실이는 그 자리에 돌아서려다 만 모습으로 서 있을 뿐 아무말이 없다. 마치 몇 년 전 강모가 혼행으로 갔던 대실의 꿈 속에서 그..

혼불 2권 (22)

처음에 동녘골양반은, 죽은 강수의 넋을 달래고 혼인을 시키는 굿을 해 주자는 동녘골댁의 말에 불같이 화를 냈었다. "미워도 자식이고 고와도 자식 아닌가요. 어떻게, 죽은 놈이라고 무심할 수가 있 단 말이요... 남이야 무어라고 하든 말든, 천금 같은 자식놈이 비명에 죽어서, 천 상으로도 구천으로도 못 가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혼신을, 잘 달래서 제 길로 가 게 해 주는 것이 부모된 도리 아니겄소? 자다가도 일어나 앉어 생각허면 내 오 만 간장이 녹아 내리고, 억장이 무너져서 잠이 안 오는데..." 나뭇가지에 바람 소리만 지나가도 동녘골댁은 가슴이 시리었다. 가지에 우는 바 람의 회초리 같은 날카로운 소리는, 그대로 그네의 살을 후려치며 에이는 때문 이었다. 어쩌다가,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난만한 시절에..

혼불 2권 (21)

"가문 날이 무덥기는. 강실아, 너 그거 멀었냐?" "아니요." "거진 다 했어?" "예." "그러면 개켜서 밟어 놓고 나랑 같이 나서자." 강실이는 풀 먹인 빨랫감이 엉성하게 일어서는 것을 다듬고만 있을 뿐, 어디를 함께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까 밖에서 어머니와 수천 숙모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무슨 일에나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는 성품 탓이기 도 했다. 푸우우. 대답 대신 사기대접의 물을 한 모금 머금은 그네는 옷가지 위 에 안개처럼 그 물을 뿜어냈다. 오류골댁도, 숨이 죽은 빨랫감을 차곡차곡 접으 며 옆에서 거들었다. "지푸라기를 엮어서 사모관대 시키고 녹의홍상 입힌다고 그게 참말로 무슨 혼인 이 될까마는, 그리도 죽은 혼신 골수에 맺힌 한도 풀어 주고, 산 사람 가슴에 박 ..

<임꺽정> (3.3.1)

-독서 리뷰- -홍명희 作- ***동우*** 22.09.03 06:38 말씀드린대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대하장편소설 '임꺽정' 연재를 시작합니다. 예전에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한 10권의 책을 이틀만에 (밤을 새워가면서) 독파할만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입니다. 아시다시피 '임껵정'은 이라고 회자될만큼 우리 옛 토속어 구사가 뛰어난 소설입니다. 연재에 앞서 '임꺽정'에 등장하는 낱말사전을 올립니다. 소설을 읽다가 낯선 어휘가 나오면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동우*** 22.09.05 06:08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의 장편 대하소설 ‘임꺽정’ 연재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업어온 간단한 해설.

내 것/잡설들 2024.01.17

<타나토노트> (3.3.1)

-독서 리뷰- -베르나르 베르베르 作- ***동우*** 22.05.28 12:09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1961~ )’는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고 인기있는 친숙한 작가입니다. 배광배(裵光配)라는 한국명이 있을 정도라니까요. 개미 시리즈(개미,개미의 날,개미혁명등)를 시작으로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 신, 뇌, 여행의 책, 아버지들의 아버지, 웃음, 나무, 제3인류 등등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거의 모든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되었을겁니다, 나타나토노트 (Thanatonautes)는 죽음을 뜻하는 타나토(Thanatos)와 항해자를 뜻하는 노트(Nautes)의 합성어랍니다. ‘저승의 탐험자’ 쯤으로 해석하면 될런지요. 가장 심오한 주제인 죽음, 이 책을 철..

내 것/잡설들 202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