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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1)

혼불 3권 1암운 십일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며 눈 오고 얼음 언다 가을에 거둔 곡식 언마나(얼마나) 하였던고 몇 섬은 환자하고 몇 섬은 왕세하고 언마는 제반미요 언마는 씨앗이며 도조도 되어 내고 품값도 갚으리라 시계 돈 장리 벼를 낱낱이 수쇄하니 엄부렁하던 것이 남저지 바이 없다 그러한들 어찌할꼬 놀양이나 여투리라 콩기름 우거지로 조반석죽 다행하다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와 줄기리라 새 책력 반포하니 내년 절후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공채 사채 요당하니 관리 면임 아니온다 시비를 닫았으니 초옥이 한가하다 단구에 조석하니 자연히 틈 없나니 등..

혼불 2권 (完, 46)

"강모가 왔는가요?" "그렇다네. 아까 참에 수천양반이랑 같이 큰집으로 올라가데. 좀 들여다볼까 싶 드구마는, 무슨 좋은 일도 아니고 해서 그냥 먼 바래기로 보기만 했네." "소문에는 하도 허황한 것이 많어서 무단히 쓸데없는 말들을 허는 거겠지. 짐작 만 속으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던가? 막상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나도 정신이 산란해서 자네한테 이야기나 할까 허고 왔구만." "어쩔라고 그랬으까요. 그 애가 암만해도 무슨 신수 액땜을 단단히 허는가 보네 요. 후여어. 저놈의 달구새끼. 무어 먹을 게 있다고 꼭 저렇게 마루 위로 올라오 는지 모르겄네. 하루 종일 닦아내도 닭 발자욱이 부옇게 찍히니. 강실아. 거 간 짓대 이리 가져 오니라. 아주 들고 앉어 있어야겄다." 수천댁과 말을 주..

혼불 2권 (45)

"그럼 그냥 집으로 갔는가 부지 무어, 할머님 편찮으신데 번거로울까봐, 중정 깊 은 것이 그렇게 했는가 보네." "아이고, 그런대도 그렇지, 저 혼자 빈 집에 앉혀 놓기가 여간 거리지 않아서 큰 집에다 재울라고 했그마는."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혼자라고 하지만 온 동네가 한집인데 무어. 무슨 일이 야 있을라고? 집에 가면 어련히 있겄지. 그나저나 자네 애썼네. 어서 가서 한숨 자야지?" "예, 내려가 봐야겄구만요." "으응. 그러게. 나도 어머님한테 들어가 뵈어야겄네." "참. 큰어머님은 그만허시고요?" "그러시다네, 더했다 덜했다..." 두 동서는 서로 무겁게 침묵한 채로 잠시 마주 바라보았다. 그때, 닭이 홰치는 소리가 깜짝 놀랄 만큼 갑작스럽게 들렸다. "아이고 형님, 별 소리에 다 놀래겄네요...

혼불 2권 (44)

"나다. 왜 사람을 보고 그렇게 놀래냐?" 아무렇지도 않게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노랗게 질린 딸의 얼굴에 오히려 놀란 기 응이 의아하게 물은 일조차 있었다. "저 아이가 요새 어디 아픈 거 아니요? 어째 저렇게 시름시름 사람이 맥이 없는 고? 아직 나이 젊은 것이." "말은 못해도 제 속에 근심이 채인데다가, 여름을 타서 그러겄지요." "좀 물어 보고 그래 보아. 혹시 가슴애피라도 있는가." "아이고, 가슴애피는 무슨. 아직 나이 젊고 어린 것이. 제가 무슨 그런 게 생길 만큼 모질게 속상헐 일 있다고." "딸자식은 애물이라 낳고 나서도 한숨이고, 키울 때는 살엄음 같고, 나이 먹으면 보낼 일이 걱정이고." 그뿐인가. 보내고 나서도 한시 잠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시집살이 매운 줄 을 누가 모르리. ..

혼불 2권 (43)

그것들은 늦은 봄볕에 겨워 독한 향기를 뿜어내며 어질머리를 일으켰다. 어떻게 나 야무지게 묶었는지 손톱이 아프게 단단한 밥 보자기의 홀맺음을 풀어 내는 강실이의 손등으로 눈물이 떨어진다. (어쩌다 그리 되시었소... 마음 고생이 얼마 나 자심했으면 이 지경이 된단 말씀이요... 그래도 여기는 어찌 잊지 않고 오시 었소. 아무도 없는데... 형님이 만나실 분도 이제 떠나고 없는데. 형님 못 잊으시 는 그 혼백은 이제 여기 안 계시오. 저재작년 엊그저께 혼인하여 멀리 멀리 구 천으로 떠나셨다오.) 이미 진예는 진예가 아니었다. 그네는 바로 강실이 자신이 었던 것이다. 저물어서야 밭에서 돌아온 오류골댁 내외는 한눈에 진예가 성치 않은 것을 알아보았다. 아무리 방으로 들어가자고 권해도 끝내 마루끝에 쪼그리 고 ..

혼불 2권 (42)

"지 나이값도 못허고, 자식 새끼 거느린 년이 넘으 숫총각을 넘보고 찌웃대는 꼬 라지는 참말로 못 보겄습디다." "내비두어, 애끼먼 똥 된다고 안허등게비. 좋은 시악시 다 놓치고 쇠고집 부리드 니만 그 꼴 났지 머, 다 지 팔짜 소관이겄지." 방이나 마당이나 다를 것도 없는 갈자리 방바닥에 등을 부리며 공배는 다시 한 숨을 삼킨다. 묵은 흙냄새가 끕끕하게 차 있는 방이지만 그 흙내가 바로 제 몸 에서 나는 땀내처럼 낯익었다. (순허게 살어야는디... 토를 달고 나서자면 손꾸락 하나도 책 안잽히고는 까딱 못허능 거이다. 또아리져서 원한 삼을 것도 없고, 치 부책으다 적어 놀 것도 없다. 풀어 부러야제. 또랑물에 가서 발이나 씻고 흘러가 는 물에다가 풀어 부러얀다. 흘러 흘러 가다가 저절로 녹아서 풀어지고 ..

혼불 2권 (41)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혀를 찬 공배가 돌아눕는다. "들으가서 주무시요. 모구가 다 뜯어먹겄소. 그나마 한 방울이나 되까마까 허는 노무 피." "방이나 한디나." 웬일인지 두 사람은 마음이 무겁다. "어쩔라고 이렁가 모리겄네. 통 어디 맘 붙일 디가 없고 말이여." "아 머언 일이 있을랍디여? 춘복이란 놈이나 옹구네 저 예펜네나 다 주뎅이가 암팡진 것들잉게 그렁갑다 허고 말어야제." "그런다고 없는 말 지어내서 허겄어? 숭년에, 가뭄에, 구설에... 이거 어디 시상 어수선해서 살겄다고?" 공배는 풀썩풀썩 연기만 내뱉는다. 중천에서 지울어지고 있는 은하수의 꽁지는 유야무야, 지워지는 흔적처럼 희미하다. (은하수가 가물었능가. 어째 물줄기가 시 언찮허다. 그나저나 춘복이란 놈도 저 주뎅이를 못 참고 오장에서 ..

혼불 2권 (40)

"잡어가도 즈그 망신이여, 안 그런당가? 곤장을 칠래도 죄목이 있어야고, 죄목을 밝히자먼 즈그 집구석 똥구녁을 뒤집는 꼴이제잉. 양반이라고 부럴 거 한나도 없다아. 집안으 누이동상 못 잊어서 상사벵으로 죽어간 놈 원한 풀어 주는 날 밤으, 큰집 작은집 오래비 누이가 또 붙어 먹었으니, 그거이 무신 양반이냐? 아 이고 꼴 사납다. 빛 좋은 개살구지 머. 껍데기만 번지르르. 차라리 나 같은 상년 은 팔짜대로 천대박고 팔짜대로 막 살응게 거짓말은 안허지, 즈그들은 헐 짓 다 해 처먹고도 누릴 것은 다아 누린당게. 에이, 던지러라."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숨죽이어 하던 말끝이 암팡지게 팽개쳐진다. 그러면서도 옹구네는 속으로 알고 있다. 원뜸의 대갓집에서 이 소문을 들으면 당장에 말 낸 사람을 뒤져내 찾을 것이다...

혼불 2권 (39)

아무래도 큰일은 큰일이었다. 설령 옹구네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그렇게 말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차피 헛소문이라도 한 바퀴 돌 모양 아닌 가. 공연히 평순네의 가슴이 무겁게 두근거렸다. "얌전헌 강아지 부뚜막에 올라앉드라고, 옛말 그른 디 하나도 없당게. 하이고매 원 시상으나. 법도 찾고, 도리 찾고, 효자.열녀 다발로 엮어 나는 집안에 무신 망 신살이여. 이런 년은 아조 내놓고 사는 노무 인생잉게 추접시럴 것도 없고 머 넘부끄럴 것도 없다마느은." 패앵. 코를 풀어 마당에 던지고 치마귀에 손가락을 문지른 옹구네는, 물 건너 열 녀비 쪽으로 길게 눈을 흘긴다. 그러더니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면서 입맛을 다시 고는, 평순네의 귀바퀴 가까이에 말을 불어 넣는다. "내가 오짐 누러 다무락 밑으로..

혼불 2권 (38)

15 가슴애피 "올다래가 피었는가." 하면서 오류골댁이 면화밭으로 나간다. 그네의 삼베 적삼 잔등이가 후줄근히 들 러붙는 것이, 보는 사람도 덥게 한다. 하늘은 아직도 쨍쨍하여 도무지 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강실이는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훑어 낸다. 그래도 금시 또 땀이 배어난다. 동여 묶은 가슴의 말기는 아예 젖어 있다. 그런 데도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네의 정신이 딴 데 가 있기 때문인가. 소쿠 리에 수북히 담겨 잇는 애호박과 가지를 한 덩이씩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납작납 작하게 썰던 그네는, 감시 칼손을 놓고 허리를 젖힌다. 젖힌 그네의 허리 쪽으로 뒤안에서 건듯 부는 실바람 한 가닥이 스치듯 지나간다. 채반 위에 널어 놓은 호박이 벌써 땡볕에 익어 허옇게 빛을 뒤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