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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11)

강모는 차라리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눈을 맞는다. 눈발은 점점 굵어진다. 어느덧 길바닥에는 발자국이 날 만큼 눈이 쌓였다. 꽃 잎을 밟듯 눈을 밟는 강모의 발밑에는 검은 발자국이 웅덩이처럼 패인다. 그 발 자국의 어둠 위에 다시 흰 눈이 날아내려 어둠을 어루 만지며 녹는다. 강모가 다가정의 골목 어귀까지 왔을 때는 이미 골목이나 지붕이나 동네까지 도 소복한 흰 눈을 머리 위에 덮고 있었다. 천지가 조용하다. 처마 밑의 네모진 창문들에서 주홍의 불빛이 아슴하게 비쳐나와 골목에 내리는 눈발을 물들이고 있다. 강모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건너편 관사의 개가 귀를 세우며 짖는 소리가 커겅, 컹, 컹, 컹, 터져나온다. 뒤따라 몇 집에서 개가 짖는다. 강모는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외투와 머리에 덮인 눈을 털..

혼불 3권 (10)

까닭없이 그를 대하면 경계심이 앞서고, 사갈처럼 소름이 일던 기표의 눈빛이 강모의 가슴에 와서 꽂혔다. 그리고, 느닷없이 귀청을 찢으며 터져 나오던 희재 의 울음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재작년 여름이었던가. 중문간 마당에서 흙으로 담을 두르고 놀면서 산더미를 쌓듯이 흙더미를 쌓아 올리던 희재의 작은 손. 아아따. 그만 우시요오. 이것이 참말로 곡석이고 참마로 황금이간디요오...이렁 거는 다 흙이요, 흐윽. 이께잇 노무 흙데미, 내가 산에 가서 바지게로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지어다 가 부서 디리께요. 천지에 쌔고 쌨는 거이 흙인디요. 이렁 거는 다 장난으로 집 짓고 노는 거이제 참말로 이거이 노적이고 살림살이 간디요오. 장난이제에. 이렁 거는 다 흙이요오, 흙. 아아따아, 울지 마시요오. 새끼머슴 붙들이..

혼불 3권 (9)

강모는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큰일날 말씀입니다.” “아니다. 할머니가 생전에 이루신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이, 뒤집어 말하면 소 작인들에게서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고 그악스레 긁어 모았다는 증명밖에 더 되 겠어? 정당한 물물 교환으로 할머니와 소작인이 서로 평등하게 이익을 나누었다 면, 도저히 그런 재산을 모을수가 없는 일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으냐? 그 양반은, 지주로서의 특권과 횡포를 최대한으로 누리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 “형님은 그렇게도 할머니를 증오하십니까?” 강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쥐고만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마 셨다. 뒤로 젖힌 그의 턱과 목으로 흐르는 선이 날카롭다. “봄에 꾸어 먹은 곡식을 가을에 이자 붙여 갚는 환자야, 나라에서도 다 행하 ..

혼불 3권 (8)

“강모, 취했구나.” 강태가 잔을 들며 강모를 본다. “예, 취했습니다. 오늘 술 좀 마셔야겠습니다. 형님, 나도 한번 취해 봅시다. 나는 지금 무엇에든지 흠방 빠져서 물에 빠진 새앙쥐같이 되고 싶습니다. 익사 라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왜 나는 취해지지 않습니 까? 그건 왜 그래요? 나는 구경꾼. 나는 내 운명에서도 구경꾼 노릇밖에는 못하 고 죽을 거요.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아니, 이 사람이 정말로 취했구만. 자, 그만 마시고 일어나자. 늦었어. 나는 또 갈 곳이 있다.” “아직 멀었는데 뭘 서두르십니까? 그렇게 서두리지 않아도, 인간이 함께 있 는 시간이란 찰나에 불과한 것인데, 오늘 내가 좀 마시면 안되겠습니까?” “주정을 하려는 것이냐?” “아니..

혼불 3권 (7)

가을 들면서부터 시작해서 초겨울이 되도록 분주한 집 안팎의 일로 이기채가 사랑을 비운 사이에 도망치듯 빠져나온 강모였다. 그의 얼굴은 여름보다 더 말 할 것도 없이 상해 있었고, 목소리조차 버슬거렸다. 그는 말이 없다. 강태의 눈빛이 강모의 모습을 쏘아본다. “너,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천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바둑판같이 미리 짜여진 사회적 현실이라는 점을 어떻게 생각허 지? 누백 년 누천 년 세월과 문화가 켜켜이 쌓여 요지 부동의 전통으로, 혹은 물 밑바닥 같은 잠재 무의식 전통으로, 견고하게 판짜기 돼 있는 사회적 현실, 말하자면 신분 세습이나 그 세습이 만든 계급은 낱낱의 개인을 인정하지 않아. 무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 무리는 모두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아..

혼불 3권 (6)

2 떠나는 사람들 “만약에 이 지상에 오직 군소 국가들만 존재한다고 하면, 아마 지금보다 인 류는 훨씬 더 평화롭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한 뱃속의 새끼도 아롱이 다롱이라고 하는데, 생성 존재의 근원이 다르고 역사와 문화가 다른 국 가, 엄청난 이권 조직인 국가가 너나없이 어슷비슷 올망졸망 그만그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각기 그 나라의 힘대로 세력이 달라져서 종국에는 힘센 놈. 약한 놈 이 생겨나기 마련인즉. 강대 국가의 존재란 불가피하지. 그런데 강대 국가가 있 으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약소 국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고 강대 국가와 약소 국가의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평화.평등이 아닌 약육강식이 이루어진단 말이야. 약육강식. 천지만물 삼라만상의 본능적 현상이 바로 약육강식이 아니냐. 말..

혼불 3권 (5)

쇠여울네의 처지가 한없이 가엾고 처량하였으며, 수천샌님 기표가 무서웠다. 그리고, 말라 비틀어져 죽었다는 쇠여울네의 자식 새끼 때문에 목이 메었다. “어쩌끄나...”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도 그네를 훨씬 놀라게 한 것은, 쇠여울네가 쇠스랑을 거꾸로 치켜 들고 이기채에게 덤볐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참 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구나. 평순네는 떨리는 다리를 오그려 붙이고 쇠여울네가 미친 듯이 찍어 내린 대청 마루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허연 허깨비처럼 앉아 계시던 청암마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네는,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송구스러워하였다. (마님은 정신을 놓고 지심서도 얼매나 마음이 아푸시까잉...저어그, 이러어케 앉어 지시든 양반이, 당신 앉으시던 자리를 저렇게 내리찍으니,..

혼불 3권 (4)

“이놈아아, 너도 위로넌 부모를 뫼시고, 아래로넌 자석 손자를 키우는 놈이라 먼 이렇게 헐 수가 있단 말이냐아. 내가 오널은 사생결딴을 낼라고 쫓아왔다. 니 가 아무리 가문 좋고 재산이 많다고는 허지마는, 사람의 탈을 쓰고 이렇게는 못 헐 거이다. 있는 사람의 문서에는 논 서마지기가 애기 콧구녁에 코딱지 같은 거 일랑가 모리겄다. 그런디이, 우리 없는 사람은 그거이 아니여어, 그거이 아니라 고오. 너느은 있는 재산에다가 귀 맞출라고 우리 논을 샀겄지마안, 우리는 목심 을 팔어 넹긴 거이다아.아이고오. 아이고오, 이런 천하에 날도적놈아아. 칼만 안 들었제에, 이거이 강도나 한가지제 어디 사람의 지서리란 말이냐. 어서 내 논 문 서 내놔라. 논문서 내놔아. 왜애, 아까워서 그리는 못허겄냐? 그러면 돈을 내놔..

혼불 3권 (3)

그러나 지금 춘복이는, 두 팔을 뻗어 움키면 그 문중의 지붕들이 거머쥐어질 것만 같았다. 그의 우왁스러운 이 짚신발로 걷어차면, 삭은 수숫대 올바자처럼 넘어갈 것만 같은 오류골댁 사립문 쪽을 그는 매섭게 쏘아본디. (내가 왜 그 생각을 진작에 못했이까. 내가 왜 그것을 몰랐이까.) 춘복이는 주먹을 부르쥔다. 그는 지금 늑대처럼 포효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그가 고함을 지르면 산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거그가 그 사램이 있는 것을 내가 이때끄장은 넘으 일이라고 생각했는디, 그 거이 아니여, 그리여. 그렇제, 그거이 아니여.) 그의 눈앞에 강실이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항상 먼 발치에서 무슨 죄 짓 는 사람처럼 힐끗 훔쳐 보았을 뿐인 그네였지마, 그리고 그나마도 좀처럼 바깥에 나오지 않는 사..

혼불 3권 (2)

아까 참에 평순네에게 해붙였던 말끝의 기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옹구 네는 볼따구니가 빨개져서 춘복이 쪽으로 돌아눕는다. 얼기설기 얽은 농막이라 시린 외풍이 선뜩했다. 춘복이는 팔베개를 한 채로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밤이 기울어 그 모습이 보일 리 없지만, 이렇게 옆엣사람 생각도 안하고 한동안 말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러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아이 그렁게 원뜸에 새서방은 사랑으다 가돠 놔도 소용없고 인자는 전주로 아조 도망을 가 부렀다 그거이제?” 아까도 한 말인데 다시 되짚는다. 춘복이는 대꾸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해도 골 똘히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먼 그 기생 첩실은 어쩠스꼬? 데꼬 살으까?” “머 도망끄장 감서, 지집 내부리로 갔을라고요?” “아이고매 정나미야. 갔을라고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