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 26

혼불 (6권)

혼불 6권   13. 지정무문  혼인하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사돈서였다. 이는 일생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로소 각기 그여아와 남아를 성혼시키고 난 후에,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시 세상에서 제일 가갑고도 어려운 사이가 된 안사돈끼리, 극진한 예절을 갖추어 정회를 담은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양가의 정의를 더욱 두텁게 하고, 자식들의 근황이며 집 안팎 대소사를 마치 같이 겪어 나가는 것처럼 이야기로 나누는, 정성과 격식이 남다른 편지였다. 허물없는 친구에게 흉금을 털어놓는 사신이 아니면서도 자식을 서로 바꾼 모친의 곡진한 심정이 어려 있고, 그런 중에도 이쪽의 문벌과 위신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푹격을 지녀야 하는 사돈서는, 조심스러우나 다감하였다. 궁체 달필로 문장을 다하여 구구절절 써내려..

혼불 6권 (44)

"지금 애기씨가 작은집으로 내려가야겠는데요?"거두절미한 효원의 말에 율촌댁보다 더 놀란 사람은 오류골댁이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강실이도 그 말을 어렴풋이나마 들었는지 몸을 움칠하였다."너 지금 정신 나갔냐? 아니, 아니 너. 너 , 누구 앞이라고.""긴 말씀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서두르셔야 해요.""이런 괘씸한 아, 이런...... 이런 일은 내 나고 첨 보겠네. 아니 너."율촌댁이 얼굴에 기가 질린 노기를 띄우며 강실이 쪽으로 한 무릎 다가앉았다. 절대로 안된다는 표시였다. 오류골댁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만 있다. 서글프고 야속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어머님. 사정이 있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말을 해라.""지금은 안됩니다."어기가 찬 율촌댁이 엉버티고 앉은 효원..

혼불 6권 (43)

"누구대?"가까이 다가온 그림자 하나가 원뜸의 깔담살이인 것을 알아보고는 짐짓 그렇게 목청을 냈다. 깔담살이와 함께 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궁금했던 것이다. 깔담살이도 옹구네를 알아본 것 같앗다. "여가 왜 있당가요?""응. 나 집이 가니라고오. 저물었네? 어디 갔다 온디야?"나이 든 사람은 옹구네 곁을 휙 스쳐 잰 걸음으로 저만치 질러 가고, 깔담살이는 옹구네한테 붙잡혀 몇 마디 대꾸를 하느라고 뒤쳐졌다. "저 냥반이 누구냐?""광생당 진의원님 아니싱교."그러먼 그렇제. 옹구네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었다."진의원님이 왜? 이 밤중에.""아이고, 나 얼릉 가 바야요. 시방 아무 정신이 없고마는.""원뜸에 뫼시고 가냐?""작은댁 애기씨 때미.""오오."어서 가 바라. 옹구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손짓으로 깔..

혼불 6권 (42)

꽃니는 목을 질금 움츠리며 제 어미 눈치를 헬금 살폈다. 어매가 무어라고 하든, 옹구네가 나타나면 꽃니는 재미가 있었다. 이제 열 살 막 넘은 계집아이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비밀스러운 수군거림이 옹구네한테서는 늘 쇳대 소리같이 절렁절렁 울렸고, 어린 눈에 보아도 가무잡잡 동그람한 얼굴에 샐쪽한 눈꼬리며 도톰한 입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뻐 보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옹구네는 꽃니를 애들이라고 무질러 몰아 버리지 않고 꼭 말참례를 시켜 주었다. 그런 것들이 꽃니는 은근히 좋았다. 언젠가 뒤안 마당에서 콩심이는 철재를 업고 서 있다가, 히끗 모퉁이를 돌아가는 옹구네를 보고 꽃니한테 "아이고, 촉새, 나는 옹구네만 보먼 준 것 없이 밉드라."고 입을 비쭉 했었지만. "우례도 나맹이로 전상으 죄가..

혼불 6권 (41)

"이 말 하나 헝 것만도 사지 멀쩡헤기는 힘든 일인다. 믿을 자리라 내가 참 죽을 작정허고 헌 말이요. 그런디 그보담 더 헌 소리를 시방 내가 해야는디, 이 말은 나 하나만 죽고 사는 거이 아니라 여러 사람 생목심 달린 거이요. 그렁게 내가 보장을 받어야 말을 허제.""보쟁이라니?""혼자만 일고 있겄다고 맹세를 해야지.""허께 해 바.""말이 쉽소.""그러먼 어디다 달어매 꼬아주까? 에럽게?""나도 암만 상년이지만 살고 잪지 죽고 잪든 안헝게 그러제.""그보담 더헌 소리란 거이 머이야, 그렁게.""내 이얘기 좀 들어 보시오. 내가 조상을 잘못 타고나서 천하 상것으로 났소. 허나, 상것이라고 넘 사는 세상을 못 살 거이요? 나도 이팔 청춘 이쁜 나이 되야서, 옹구 아배 만나 귀영머리 마주 풀고 작수 성례 ..

혼불 6권 (40)

"네가 혼인해서 이제 시댁으로 갈 때 이 신랑 주발에다가는 흰 찹쌀을 담고, 신부 바리에다가는 붉은 팥을 하나 가득 담는 거란다. 그래 가지고 각각 이렇게 대접에다 받쳐서 홍보에 싸지. 수저는 네가 곱게 수놓은 그 모란꽃 화사하게 흐드러진 수저집에다가 한 벌식 넣고. 그렇게 가지고 가면, 느그 시댁에서는 신부를 새로 맞이해서 구고례를 치르고는, 큰상을 채려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날 저녁에는 신부가 식기에 담어 온 흰 찹쌀 붉은 팥으로 찰밥을 지어 밥상에 놔 주니라."그것은 신랑 신부가 서로 찰밥처럼 찰지고 다정하게 살라는 축수와 붉은색이 모든 액을 물리쳐 주기 바라는 벽사 제액의 기원이 깃든 밥이었다. 성년의 첫 밥. 내 그 밥그릇을 채울 일이 없으리라. 이제는 내가 누구에게로 혼인하여 시집을 가..

혼불 6권 (39)

23. 시앗  세월이 묵은 담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장독대는 마당보다 두어 단이나 높다. 자잘하고 반드러운 돌자갈을 쌓아 도도록이 채운 장독대에 즐비한 독아지와 항아리, 단지들이 기우는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서글프고 정갈하게 타오른다. 여름날이었다면 이런 시간, 장독대를 에워싸고 피어나는 맨드라미의 선홍색 꽃벼슬이며, 흰 무리, 다홍 무리 봉숭아꽃들, 그리고 옥잠화의 흰 비녀가 주황에 물들 것이지만, 분꽃의 꽃분홍과 흰 꽃들도 저만큼 저녁을 알리며 소담하고 은성하게 피어날 것이지만. 지금은 꽃씨가 숨은 껍질이 땅 속에 묻힌 채 터지지 못하고 있으니, 노을은 저 홀로 주황의 몸을 풀어 어스름에 섞이면서 장독대를 어루만져 내려앉는다. 그 장독대에 선 네 여인의 흰 옷과 검은 머릿결 갈피로도 노을..

혼불 6권 (38)

두 동서는 마주 받으며 잇던 말 끝에 서로 보고 웃었다. 내일은 장을 담그는 날이라, 매일같이 맑은 물로 닦아내는 장독을 오늘따가 어느 때보다 정성들여 돌보고 매만지는 유촌댁 손길에 햇빛이 묻어났다. 오류골댁은 옆에서 그 일손을 거든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대 뒤안 장꽝 장독대에 즐비한 장독 뚜껑을 반드시 열어, 신선한 공기를 쏘이게 하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의 깨끗한 햇볕을 쪼이게 하는 장독들. 쌀 세가마가 들어간다는 우람한 독아지는 대를 물린 장독이요, 그 옆에 해를 묵여 걸쭉해진 진간장과, 진하지 않은 간장 청장 항아리가 놓이고, 김칫독들이 어깨를 반듯하게 맞댄 맨 뒷줄은, 한낱 흙을 구워 만든 독이라기보다 위엄 있는 가문의 엄위를 자랑하며 버티고 앉은 마나님을 보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 ..

혼불 6권 (37)

그러다가 초아흐렛날.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튼다." 는 무신일 무방수날인지라 귀신 없는 이날을 놓치지 않고, 무엇을 해도 탈이 없다 해서, 집집마다 안방 건넌방의 가재 도구들을 옮기기도하고, 지붕이며 바람벽, 부뚜막이나 뒷간 들을 수리하기도 하며, 아낙네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장을 담그었다. "장 담기에 제일 좋은 날은 암만해도 정묘일이지 머."율촌댁은 마침 큰집으로 올라온 오류골댁한테 말했다. "그럼 내일이지요?""하아. 자네도 내일 담을라는가?""그럴라고요.""그게 참 요상헌 일이데. 무얼 그러랴 해도 신날 장을 담으면 꼭 장맛이 시고, 물날 담으면 꼭 장이 묽어진단 말이야.""그러니 날 놓치면 큰일지요. 오도 가도 못허고 신일 수일에 장 담게 되면 참 난감헐 일 아니요잉? 일년 농사 안 중헌 것이..

혼불 6권 (36)

22. 안개보다 마음이  사람의 일이, 토방에서 대문간만 나가려도 자칫 잘못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수가 있는데, 한나절 좋이 걸어가야 하는 십 리 길은 어떠할꼬. 떨쳐입은 진솔옷에 흙탕물도 튀어오르며, 비단 갖신 고운 발로 지렁이도 밟으리라. 내 앞을 가로지르는 미친 개, 누런 황소도 만나겄지. 길도 또한 평탄치만은 않아서, 냇물도 건너며, 고개 넘어, 산모롱이 길게 휘돌아 지루하게 멀리 걷기도 할 것이다. 십 리가 그러할 때 하루 해 온종일 깜깜하기까지 걸어야 하는 백 리라면 어떠할까. 가다가 길이 끊어진 곳도 있고, 돌짝밭 가시덤불 뒤엉킨 골짜기도 있거니와 집도 절도 없는 길에 고적하고 막막하기 뙤약볕 속 나그네 같은 고비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천 리 길이야. 하루도 이틀도 아닌 그 길을 가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