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 26

혼불 6권 (35)

"철재도 인제 내년이면 입춘문 쓰게 되겄지?"사리반댁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입춘대길', '건양다복' 혹은 '국태민안'이라고 대문에 써붙이는 입춘문, 입춘서는 글 잘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 집안에서 제일 나이 어린 꼬마동이 사내아이가 썼다."우리 집에도 입춘문 쓸 만한 소년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널리 과시하는 뜻도 있고, 그 순진무구한 고사리 손으로 콧 등에 땀방울 송글송글 돋아나게 정성을 다하여 쓴, 순결한 글씨를 부적으로 삼아 한 해의 복을 비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철재가 올에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내년에 이르러는 입춘문을 쓸 수 있게 되리라는 말을 띄운 사리반댁은 "국문 천자 노래가 있거든."하였다. "심심할 때 외워 보소."가갸거겨 가신임은 거년에 소식이 돈절하고 고교구규 고대한님..

혼불 6권 (34)

"양반의 시집살이는 민어 가시같이 억세고도 섬세해서, 효덕아, 나는 정말 우리 집안보다 좀 수월한 가문으로 시집가야지 했었다."너희 외가도 참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집안 아니냐. 양반이란, 남 보기에 위세 있고 품격 있어 감히 우러르기 아득해 보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것이다. 그 미묘하고 까다로운 법식, 절차 심리적인 중압감에 앉고 서는 것이나 행동거지 갈피 갈피가, 조금만 어긋나면 비웃음을 피할 수 없고, 조금만 아차 해도 큰일이 나는 것이라. 말 안해도 헤아려 알아야만 양반이지. 그리고 무엇이든 제가 다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리기를 매미 날개마냥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그 공들이고 매만지는 부녀자 손끝이 매사에..

혼불 6권 (33)

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단청으로 나부끼며,..

혼불 6권 (32)

21. 수모  "남편이 소실을 두는 것은, 나 자신에게 몹쓸 질병이 있거나, 몸소 집안일을 할 수 없건, 혹은 혼인한 지 오래되었어도 아들을 낳지 못해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 데 까닭이 있다. 남편이 비록 소실을 두려 하지 않더라도 이런 정황이면, 옛날의 어진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한테 권하여, 사방에 널리 알아 보아 어질고 정숙한 사람을 구해다가, 그 여인을 예법대로 가르쳐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투기를 하겠느냐. 혹 내게 병이 없고 아들이 있는데도 남편이 여색을 탐내서 여러 희첩을 두어 본성을 잃고 행실을 어지럽게 가지며, 미혹하고 음란한 일에 빠져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집안의 재물을 탕진한다면, 마땅히 정성스러운 뜻으로 힘써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권하며 경계하고, 듣지 ..

혼불 6권 (31)

"철재도 인제 내년이면 입춘문 쓰게 되겄지?"사리반댁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입춘대길', '건양다복' 혹은 '국태민안'이라고 대문에 써붙이는 입춘문, 입춘서는 글 잘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 집안에서 제일 나이 어린 꼬마동이 사내아이가 썼다."우리 집에도 입춘문 쓸 만한 소년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널리 과시하는 뜻도 있고, 그 순진무구한 고사리 손으로 콧 등에 땀방울 송글송글 돋아나게 정성을 다하여 쓴, 순결한 글씨를 부적으로 삼아 한 해의 복을 비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철재가 올에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내년에 이르러는 입춘문을 쓸 수 있게 되리라는 말을 띄운 사리반댁은 "국문 천자 노래가 있거든."하였다. "심심할 때 외워 보소."가갸거겨 가신임은 거년에 소식이 돈절하고 고교구규 고대한님..

혼불 6권 (30)

"양반의 시집살이는 민어 가시같이 억세고도 섬세해서, 효덕아, 나는 정말 우리 집안보다 좀 수월한 가문으로 시집가야지 했었다."너희 외가도 참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집안 아니냐. 양반이란, 남 보기에 위세 있고 품격 있어 감히 우러르기 아득해 보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것이다. 그 미묘하고 까다로운 법식, 절차 심리적인 중압감에 앉고 서는 것이나 행동거지 갈피 갈피가, 조금만 어긋나면 비웃음을 피할 수 없고, 조금만 아차 해도 큰일이 나는 것이라. 말 안해도 헤아려 알아야만 양반이지. 그리고 무엇이든 제가 다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리기를 매미 날개마냥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그 공들이고 매만지는 부녀자 손끝이 매사에..

혼불 6권 (29)

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단청으로 나부끼며,..

혼불 6권 (28)

21. 수모  "남편이 소실을 두는 것은, 나 자신에게 몹쓸 질병이 있거나, 몸소 집안일을 할 수 없건, 혹은 혼인한 지 오래되었어도 아들을 낳지 못해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 데 까닭이 있다. 남편이 비록 소실을 두려 하지 않더라도 이런 정황이면, 옛날의 어진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한테 권하여, 사방에 널리 알아 보아 어질고 정숙한 사람을 구해다가, 그 여인을 예법대로 가르쳐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투기를 하겠느냐. 혹 내게 병이 없고 아들이 있는데도 남편이 여색을 탐내서 여러 희첩을 두어 본성을 잃고 행실을 어지럽게 가지며, 미혹하고 음란한 일에 빠져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집안의 재물을 탕진한다면, 마땅히 정성스러운 뜻으로 힘써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권하며 경계하고, 듣지 ..

혼불 6권 (27)

옹구네는 한숨을 늦추며 중치 대신 늑막을 질렀다. 대가리 송곳맹이로 세우고 달라들어 밨자 놀랠 사람도 아니고, 무단히 잘못 건드러 노먼, 아닝게 아니라 일은 저릴렀능게빈디, 이 마당에 머이 아숩다고 나 같은 년을 지 저테다 둘라고 허겄냐. 떨어낼라고 허겄제. 성가싱게. 그렁게 숨돌려. 너는 마느래가 아닝게로. 시앗 본 본마느래맹이로 길길이 뛰고 굴르고 허먼 니 손해여. 너는 시방 그럴 처지가 아닌 걸 너도 알어야여. 설웁지만 처지는 알어야여. 숨쥑여. 씨리나 애리나 쉭이고 들으가. 야를 저트다 둬도 벨 손해는 없겄다, 아니 이문 볼 일이 많겄다, 그런 생객이 들게 해야 여. 그러고 뒷날을 바. 알었제? 뒷날에 갚으먼 되야. 내일 안 죽응게. 모레도 안 죽응게. 오냐. 내 채곡채곡 싸 놨다가, 실에다 바늘..

혼불 6권 (26)

"어디 갔다 왔대?"재차 물어도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겁고 깊은 한숨을 토하였다. 어찌 보면, 그가 힘없는 창호지처럼 펄럭 쓰러지지 않는 것은 뱃속에 삼키고 있는 그 한숨의 무게 때문인 것도 같았다. 춘복이는 제 한숨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왜 이러까. 자꾸만 몸 속에서 진기가 연기같이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손금 사이로 힘없이 새는 속 기운은, 주먹을 쥐어도 모아지지 않고 그만 스르르 풀리며 흩어져 버리었다. 다리에도 힘이없어, 깍지를 끼고 모아 세운 무릎이 픽 모로 쓰러지려 하였다. 꿈인가. 안 그러먼 내가 헛것이 씌여 도깨비한테 홀렸이까. 그게 아니라먼 그런 일이 대관절 어뜨케 그렇게 꿈맹이로, 참말로, 똑 거짓꼴맹이로, 일어날 수가 있단 말잉가. 그러나 그것은 꿈도 아니고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