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 26

혼불 6권 (25)

두려움과 호기심과 조롱으로 펄럭이며 불꽃 따라 너울대던 아낙의 날렵한 혓바닥들은 어느새 시퍼런 비수처럼 곤두서고 있었다. 칼날은 베거나 찌르고 싶어한다. 그들을 불너울 이쪽에서 힐긋힐긋 훔쳐보는 옹구네 검은 눈에도 비수 같은 불길이 파랗게 일었다. 장사 댕기는 예펜네가 이런 일에는 제 격이제. 지일이여. 이 집 저 집 문밖마동 말 뿌리고 댕기는 디는 이만헌 사람들이 없제이. 그네는 벌써부터 날 새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흥겹고도 음모에 가득 찬 밤이 한바탕 거꾸러지도록 징 치고 꽹과리 치며 놀고 싶은 들쑤심을 감당히기 어려웠다. "야는 어기 갔다냐."공배가 춘복이 찾는 말 하는데 공배네는 옹구네를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고리배미 사람들이 너나없이 나와서 뒤설킨 솔밭 삼거리 ..

혼불 6권 (24)

20. 남의 님  "자알 했그만. 잘 했어. 하이고오. 이뻐서 등짝을 패 주겄네 기양. 아조 쪼개지게 패 주겄어어."휘유우. 옹구네는 시퍼렇게 심지 박힌 음성을 어금니로 짓갈아 응등그려 물면서 그렇게 비꼬고는, 외마디 한숨을 토했다. 춘복이는 주빗주빗 뒤엉켜 부수수 일어선 부엉머리를 봉분만하게 이고 앉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질 같이 뻗세게 쑤실쑤실 휘감아 솟구친 눈썹도 웬일인지 숨이 죽어 시커먼 빛이 가시고, 낯색도 해쓱하여 여윈 듯한 모습이 도무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춘복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두 팔로 무릎을 깍지 끼고 앉은 채 꺼부정한 등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그는 입술조차 퍼르스름 핏기 없이 질린 빛이었다.그는 푸른 물이 묻어난 백지장같이 얇아 보였다. "아니, 얼빠졌능게비. 정신채려어..

혼불 6권 (23)

"그렁게 궁리를 해야능 거 아니여? 테머리를 매고.""아이고, 무단히 언감생심 맞어 죽을 궁리허고 있다가, 새터서방님 덜컥 돌아오세 불먼 어쩔 거이요? 헛심만 팽기제.""그렁게 못 오게 해얄 거 아니라고? 아조 못 오게.""못 오게요?"우례의 두 눈이 옹구네가 보아도 놀랄 만큼 벌어졌다. 이 무슨 황당하고도 어림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수천샌님 안픾의 양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제 상전의 댁 청암마님, 율촌샌님, 율촌마님, 그리고 양쪽 집안 대실아씨, 새터아씨들이 날이 새면 까치 우나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밤이 오면 돌아오나, 행여라도 잘새들의 날개치는 소리에 섞여 오는가,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두 서방님. 그들은 두 집안에서만이 아니라 온 문중에서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해..

혼불 6권 (22)

"그렇다면 그렁갑다, 그렇구나, 허먼 그렁 거이여.""그러먼 시방 있는 우리 아배는 또 누구여?"봉출이는 정쇠를 떠올리며 머뭇머뭇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 아배도 아배제잉."우례는 한숨을 쉬며 탄식같이 대답하였다. 왜 이렇게 나는 몰르겄으까아. 어미 우례는 봉출이가 아부님과 너무나 똑같이 닮아서 하늘 아래 누구라도 한 번 보면 두 말을 더 못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막상 봉출이는 그 아부님을 똑바로 뵈온 일이 없어서, 그리고 제 얼굴도 본 일이 없어서, "누가 부자지간 아니라께미 원 저렇게도 판백이로 같으까잉."하는 옹구네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느님이, 이렁 걸 보먼 꼭 지신단 말이여. 하늘이 무심치 않으싱게로 설웁고 속 아픈 꽃니어매, 불쌍허고 가련헌 우례 신세, 사람 보고는 어따 대고 말도 ..

혼불 6권 (21)

고샅에서 그를 본 사람들이, 하루 종일 우례가 봉출이 찾으로 다닌 것을 아는지라 "자, 봉출이 아니여? 야, 너 어디 갔다 오야?"저마다 감짝 놀라 물었다. "오수 갔다 와요오."봉출이는 기진맥진 겨우 끌어내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아이, 봉출아, 너 한 죙일 어딨었냐? 느그 어매가 아조 죽을 혼났다. 너 찾이로 댕기니라고. 어디 갔었더?" "오수 갔다가 와요오.""오수?"아낙이 의아하여 반문하는데 봉출이는 다리까지 절룩절룩하며 발을 지일질 끌고 걸었다. 그는 몹시도 지쳐 보였다. 그리고 허기져 보였다. 조그만 몸둥아리가 동그랗게 고부라진 봉출이를 발견한 우례가 그만 우르르 달려들어 대가리를 야무지게 쥐어박고는, 하루 종일 애가 탄 끝이라 돌아온 것만 해도 반가워, 한마디만 물었다. "너 어디 갔었냐."..

혼불 6권 (20)

"아이, 수천샌님은 그렁게 참말로 무신 언질 한 마디도 없능가? 개닭 보디끼 봉출이한테 완전 넘맹이로 허세? 그러든 안허시겄지, 설마. 신분이 웬수라 그렇제 자식은 자식인디. 누구 넘들 눈에는 안 띠여도 속새로는 머 오고 간 끄터리가 있을 거 아니라고?"나이 우례보다 한 둘 더 먹은 옹구네는 우례를 한쪽에서부터 살살 돌려가며 변죽을 긁어 두 사람 사이를 조였다. 우례한테 파고들기 위해서는, 우례한테 제일 아프고 서러운 끌텡이를 건드리어 들추며 동정하는 것이 제일 손쉬운 때문이었다. "산지기 박달이 자식도 보통핵교 가고, 수악헌 백정 택주네 자식도 책보 둘러메고 핵교 가등만. 온 시상이 다아는 양반의 자식으로 이씨가문 피 받어난 봉출이가 무신 죄 졌다고 넘 다 가는 학교를 못 가, 긍게. 시절도 인자는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