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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1)

9 베틀가 인월댁은 드디어 북을 놓는다. 그리고 허리를 편다. 두두둑, 허리에서 잔뼈 부 서지는 소리가 나며 갑자기 전신에 힘이 빠진다. 그네는,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어깨를 힘없이 몇 번 두드려 보다가 허리를 받치고 있는 부테의 끈을 말코에서 벗긴다. 뒷목도 뻣뻣하고 다리도 나무토막처럼 굳어져서 이미 감각이 없는데, 마 치 그네가 베틀에서 내려앉기를 재촉이라도 하려는 듯 닭이 홰를 친다. 벌써 세 홰째 우는 소리가 새벽을 흔든다. 용두머리 위에 놓인 바늘귀만한 등잔불이 닭 이 홰치는 소리에 놀라 까무러치더니, 이윽고 다시 빛을 찾는다. 방바닥으로 내려 앉은 인월댁은 그제서야 허릿골이 빠지는 것처럼 저려와 그대로 무너지듯이 드 러누워 버렸다. 불기 없는 바닥이라 등이 서늘하다. 비록 여름이지만, 늘 이렇..

혼불 1권 (完, 48)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이 철딱서니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하에 쓰잘 데 없는 놈 같으니라고, 네 이놈, 네가 대체 중정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집구 석이 멸문하여 성이 없어지고 문짝에 대못을 치게 생긴 이 마당에, 기껏 네가 하는 일이, 소위 종가의 종손이라는 놈이, 애비는 피가 바트고 뼈가 마르는 마당 에 떠억 버티고 앉아서 허는 말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음악을 공부하러 일본으 로 가야겄습니다? 허허, 집구석이 망헐라면 대들보가 먼저 내려앉는다더니, 일본 놈 창씨개명 나무랄 거 하나도 없구나아, 하나도 없어, 아니 내 집구석에서 내 자식놈이 먼저 항허느라고, 제가 자청해서 풍각쟁이가 되겠다니, 성시가 있으면 무얼 허며 가문이 있으면 무얼 헐 것이냐? 아이고, 아주 너한테는 잘되어 버렸 구..

혼불 1권 (47)

이기채는 검은 가방 쪽으로는 힐끗 한 번 눈을 주다가 말고 강모에게 다그치 듯 묻는다. 말끝이 툭 떨어지며 잘리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기색이다. 그의 기색 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마의 주름과 좁혀진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은 날이 서 있었다. 강모는 그런 이기채에게 얼른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 강모의 바랜 듯한 낯빛이 더욱 바래는 것 같더니 "저... ." 하고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어 버린다. 이기채는 채근하는 대신 강모를 쏘아본 다. 그 눈길에 얼핏 붉은 핏발이 돋는다. 번뜩 화광이 비치는 것 같다. 그는 금 방 터지려는 무엇인가를 지그시 눌러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디 하는 양 을 좀 보자, 하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아버지한테 좀 뵈드리려고요." 강모는 이기채 앞쪽으로 몸을..

혼불 1권 (46)

...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만 십칠 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 만 십칠 세 이상의... 남자. 그러나 그것은 말하기가 좋아 지원병이지 강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국민정 신총동원조선연맹'을 통하여 지원병 지원을 권유하였으며, 그 응모를 보다 효과 적으로 권유하기 위하여 설전부대를 조직하고, 지원병 후원회 및 행정력, 경찰력 을 동원하여 계몽선전을 하였는데, 그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지원병에 응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영문 모를 전장에서 탄알받이 로 죽어갔다. "일본놈들이 볼 때, 조선 사람이 어디 사람같이 뵈겠습니까? 마소보다 더 노동 력이 월등 유효헌 짐승이올시다. 거기다가 조선땅이 그저 병참기지 정도가 아니 에요. 조선 사람 모두가 전력원이 되는 겁니..

혼불 1권 (45)

"저노무 외양깐, 팍 뿌수거 부러라. 체다뵈기도 싫다. 하이고오, 웬수엣 노무 시사앙. 두 눈꾸녁을 이렇게 버언히 뜨고 자빠져서 황소가 끄집혀 가는 것을 체 다만 보고 있었이니... ." 그 남정네의 안사람이 짚북더미 같은 머리에서 꾀죄죄한 수건을 벗겨 내리며 따라서 한숨 쉰다. "글 안허면 어쩔 거이요? 생우 공출이 머 어지 오널 일이간디? 넘 다 당헐 때 는 넘 일인가 싶드니마는 참말로 발 등에 베락 떨어졌소. 인자 이 동네에는 소 새끼라고는 씨알머리도 없응게, 농사 질라면 재 너머로 황소 빌리로 가야겄구만 요." "재 너머에는 무신 소가 남어 있다간디? 거그도 다 진작에 씨가 말러부린 지 오래여... . 이러다가는 조선 팔도에 송아치새끼 씨종자가 멜종을 허고 말 거이 네." "아, 재 너머에 왜 황..

혼불 1권 (44)

그네의 가슴속에는 이 생각이 깊숙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청암부 인은 그때 같지가 않으시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눈에 띄게 초췌하여지는데 다가, 전에 않던 말씀도 힘없이 하시지 않는가. "여보게, 인제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네." 한 번은 부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붙들이가 마당 쓰는 것을 보며 안서방네에 게 그렇게 탄식하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안서방네는 민망하 여 아무 대답도 못하였지만, 청암부인은 바로 며칠 전에도 이기채를 앞에 하고 또 그 말을 뇌었다. "인제 두고 보아,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니."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반박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마당에 와서 창씨개명이라니, 이기채는 ..

혼불 1권 (43)

"네가, 감히, 누구를." 청암부인은 옆사람에게조차도 들리지 않을 만큼, 숨을 잘라 뱉어내듯이 말했 다. 그러더니 동댕이치듯 머리채를 놓아 버렸다. 아낙이 휘청하며 그만 길바닥으 로 동그라졌다. 아무러면 어린 여인의 힘 때문에 그네가 쓰러졌을까. 아마도 창 졸간에 너무 놀라 얼이 빠진 탓에 그렇게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으리라. "사람이란 엄연히 상하가 있는 법이거늘, 너 이년,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로 누구한테 그런 막된 행실을 하는 게냐. 내, 네년을 단단히 가르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청암부인은 길바닥의 아낙에게 일별을 던지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 마디 로 "가자." 하더니, 몸을 돌려 가마에 탔다. 그네가 소복 입고 오는 신행길에 버릇없이 민 촌 아낙을 끌고 와, 마당에 꿇어 엎드리게 해 ..

혼불 1권 (42)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울면서, 마침내 시퍼런 치수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 다. "내가 일찍이 식처곡부의 이야기를 왜 모르겠는가, 아녀자 오륜 행실의 본이 되는 그 사람은 열녀로서 가히 장한 사람이었으니, 내가 그를 따라 목숨을 버리 는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었지 아무 흉될 것은 없었지만, 그때 내가 기량식의 아 내 못지않은 기구한 형상 중에도 목숨을 버리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은, 오로지 종부였기 때문이었느니라. 내게는 나 홀로 져야 할 책임이 있고 도리가 있었던 게야." 청암부인은 효원의 숙인 이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같은 말을 몇 번씩 하는 것은 듣기에 따라 공치사도 같고 부질없는 일도 같 다마는, 너 또한 책임과 도리가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이렇게 새겨들으라 고 자꾸 말하느니, 허나, 처지..

혼불 1권 (41)

"형님, 용단을 내리셔야지 이러고만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 큰 봉변 당하게 됩니다. 그게 어디 종가 한 집에만 닥칠 일인가요? 문중에 서도 대강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는데 형님이 결단을 허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일본이 어디 쉽게 망헐 나랍니까? 그 사람들 무섭습니다. 허는 짓을 보면 모릅 니까? 요시찰인이 되어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그렇잖어도 총독부에서 위험 분 자는 총검거하라는 검속 명령이 내렸다는데, 공연한 화근을 왜 불러일으킵니까? 그렇기만 헌 것이 아니라, 일전에 고등계 나까지마 주임이 그런 얘길 해요, 곧 징병령이 발표될 거랍니다. 아 왜, 그 육군 특별지원병 모집헐 때도, 조선 청년 들을 모두 강제로 끌어가다시피 허지 않았어요? 끌어가면 끌려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혼불 1권 (40)

8. 바람닫이 며칠 사이에 벌써 여름 기운이 끼친다. 달구어진 햇빛에서 훅 놋쇠 냄새가 난 다. 더위가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덥다가도 한 번씩 비가 쏟아져서, 초 목은 날로 무성하여지고, 집 안팎에는 파리, 모기가 극성이다. 고샅에도 토담 밑 에도 잡초가 검푸르게 우거질 지경으로 농부들은 일손이 바쁘다. 봄보리, 밀, 귀 리를 베어 내고, 논밭에 서로서로 대신하여 번갈아 들면서 김매기를 하느라고, 땀이 흘러 흙이 젖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위에서 내리쪼이는 놋쇠 같은 햇 볕 때문에 헉, 헉, 숨이 막힌다. 거기다가 손이 많이 가는 면화밭은 그 공이 몇 배나 더 하여, 호미질을 하고 나면 어깨가 빠지는 것만 같다. 그런 중에도 누우 런 오조 이삭이 어느덧 묵근하게 살이 차고, 청대콩도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