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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31)

7. 흔들리는 바람 "창씨라니, 도채체 그게 무슨 말인가? 대관절 무얼 어떻게 한다는 게야?" 청암부인의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방안에 앉은 기채와 기표는 책상다리를 한 발바닥을 쓸고만 있다. 이기채는 흰 버선발이고, 기표는 엷은 회 색 양말을 신었다. 기표는 그 차림까지도 양복이다. 하기야 문중에서 맨 먼저 상 투를 자른 사람이 기표였고 보면, 그의 저고리가 단추가 여섯 개씩이나 달린 양 복으로 바뀌고, 신발이 숭숭 뚫린 구멍에 검정 끈을 이리저리 꿰어 잡아당겨서 묶어 매는 구두로 바뀐 것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이제 오히려 기표 의 그런 모습은 당당하기까지 하고, 그 나름대로 차림이 몸에 익어, 보는 사람의 눈에도 익숙해져 버린 터였다. 이기채는 그런 기표와 달리, 아직도 두루..

혼불 1권 (30)

"좀 먹어 두게. 이따가 폐백 드릴라면 힘들고 기운 빠지네. 한 술 들어, 안 먹 히더라도." 한 부인이 친절하게 숟가락을 쥐어 주었으나, 그네는 힘없이 상 위에 놓고 말 았다. "옷을 갈아입어야지." 아무래도 신부가 음식을 먹지 못하리라고 짐작한 부인은 상을 물리게 하고, 효원에게 폐백차림을 지시한다. 폐백을 드릴 시간이 된 것이다. 대실에서부터 따 라온 수모와 하님이 벗기고 입히고 꾸미는 대로 내맡기고 있던 효원은 대청마루 의 폐백상 앞에서 다시 한 번 크게 가슴을 내려앉았다. 흥겹고 다홍 비단이 덮 인 폐백상 위에 대추와 편포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 시부모가 나란히 앉아 있었 다. 이기채는 대실 초례청에서 얼핏이나마 보았으나 율촌댁은 초면이다. 율촌댁 이 효원을 놀라게 한 것이다. 남색 치마에 연두색..

혼불 1권 (29)

"나는 아무래도 동경으로 가야겠소." 강모는 신행 오던 날 밤이 늦어서야 마지못한 듯 건넌방으로 들어와 효원의 맞은편에 다리를 개고 앉더니, 양 무릎에 주먹 쥔 손을 올려 놓고 눈을 약간 내 리뜬 채 말했다. 마치 외어 온 구절을 낭독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어 어색하였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린가. 효원은 마음이 철렁하여 강모를 또바로 바라보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단지, 무슨 동경에 가고 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곳에 숨겨진 속뜻이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한 일이오." 강모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대실에 가기 전에 할머니께서도 허락을 하셨소." 허락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강조한 뒤에 "얼마가 걸릴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니 그렇게..

혼불 1권 (28)

"아퍼? 아아직 멀었네." 이번에는 좀더 세게 내려친다. "으아."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련만 발바닥이 얼얼하며 복숭아뼈까지 저린다. "허허어. 이러언 엄살 좀 보라지. 이래 가지고 어찌 무슨 용기로 남의 규방에 는 침범을 했던고오?" 다시 홍두깨가 발바닥을 친다. 철썩 따악. 내려치는 홍두깨와 강모의 비명, 사람들의 농담과 터지는 웃음 소리들은 박자 라도 맞추듯이 함께 어우러지며 촛불에 일룽거린다. "자네 감히 허씨 문중을 넘보았겄다? 우리가 그렇게 울도 담도 없이 허술한 줄 알았던고?" "거기다가 자네 어쩌자고 인제서야 얼굴을 내미는가? 일각이 여삼추라고, 날만 새면 동구밖에 무슨 기척이라도 있는가, 있는 목, 없는 목 다 뽑아 올리고 내다 보며 학수고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자네 그간 어디 가서 ..

혼불 1권 (27)

"온 세상에... .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구려." "다래머리의 사방 높이 넓이가 가히 한 자를 넘었었데." "지금이라고 왜 그런 일이 없으리? 그 이름만 다래다, 자수다, 바뀌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로 과잉하게 마음이 쏟아져 걷잡지 못하게 사치를 하는 것은 변함 없을 것이다. 집이든, 의복이든, 금패든, 사치를 하기로 들면야 어떻게 감당하겠 느냐?" "그런데 형님, 이렇게 베갯모에 학이나 수놓고 목단문 보자기에 꽃송이나 피우 는데도, 자수가 어찌 재산을 탕진시키리까? 색실 몇 올이 무에 그리 큰 재산이 든다고." 용원은 수를 놓고 있던 베갯모에 바늘을 꽂으며 물었다. "금실 은실을 써 보아라. 탕진은 눈 깜짝할 사이지. 그래서 고려 정종 9년 사 월에, 금중외남녀 금수소금 용봉문 능라의복이라하여, ..

혼불 1권 (26)

(저것들이 아마 합궁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는 근심이 두 내외의 표정과 분위기에서 역력히 느껴질수록 효원은 더욱더, 모든 일이 순탄한 듯 꾸미고 있어야 했다. 정씨부인인들, 아무리 여식이라 하나, 그것을 발설하여 효원에게 곧바로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신방에서는 무사하였느냐?" 고작 그렇게 물을 수밖에 다른 말은 차마 더 하지 못하였다. 그럴 때, 효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수그리면 되었다. 그저 미루어 짐작하시라는 표시다. "긴히 쓰일 일이 있으리라." 신방에 드는 효원을 따라 들어왔던 정씨부인은 원앙금침의 호화로운 자리밑에 서리처럼 하얀 삼팔주 수건을 고이 넣어 주었다. 중국에서 나던 귀한 명주를 무 엇에 쓰라고 어머니가 손수 거기 접어 넣어 두는지 효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이 발갛게 ..

혼불 1권 (25)

6. 홀로 보는 푸른 등불 효원의 방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다. 청암부인이 율촌댁과 함께 거처하는 큰방의 등불은 한식경 전에 꺼지고, 잠시 후에 사랑채의 큰사랑에 불이 꺼졌다. 그러니, 이제 안채의 큰방과 대청마루 하나를 사이에 둔 효원의 건넌방에 불이 꺼질 차례인 것이다. 웃어른의 방에 불이 꺼지기 전, 그 아랫사람들이 먼저 불을 끄고 잠들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순서를 지키는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율촌댁이 이 댁으로 시집와서 건넌방에 든 그날로부터 이날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지켜져 온 일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만, 그것은 감히 누가 깨뜨릴 수 없는 불문율처럼 위엄있게 밤마다 행하여졌다. 율촌댁은 효원이 신행을 오기 며칠 전에, 좋은 날을 받아 청암부인이 거처하는 안방..

혼불 1권 (24)

"어머니." 아까 구로정에서부터는 거의 내닫다시피하여 냇물을 건너고, 날아가듯 중뜸 고샅에 이르자 숨이 턱에 닿았는데, 집의 대문, 중문을 들어서면서는 자기도 모 르게 큰 소리로 토하듯이 어머니를 먼저 부른다. 건넌방 문이 열리며 율촌댁이 내다본다. "?" 강모는 순간 의아하였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면 어머니가 저리 한가롭게 건넌방에 계실 리가 있는가... ,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어서 오너라." 목소리에 반가움이 피어난다. 그러고 보니 집안 또한 우환이 있는 집 같지 않 고 평온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강모는 우선 댓돌 위에 구두를 벗는다. 율 촌책은 강모가 마루로 올라서기를 기다려 큰방 문을 먼저 연다. "어머님, 강모 왔습니다." "오냐." 청암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모는 다..

혼불 1권 (23)

"여인네가 공명심이 저리 많아서." "지맥을 건드려 공연한 동티가 나면 어쩔 것인가?" "이 난리 안 쳐도 지금까지 농사 못하지는 않었네." "과숙의 몸으로 이날까지 모은 재산, 남 보라고 호기롭게 한 번 써 보자는 것 일 테지." "농토나 더 늘릴 일이지." "이제 보게. 빚 지고 말 것세." 구로정에 모이거나 사랑에 마주앉으면 그런 뒷공론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 것은 이웃 동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까닭없이 어수선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른아홉이면 아직도 중년도 여인인데, 그네가 열아홉에 빈 집으로 신행 온 지 만 이십 년, 그 사이에 이루어 놓은 그네의 치부에 내심 기가 눌린 탓도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종부는 하늘이 내리시는가, 저렇도록 큰일을 아낙의 몸으로 일으키다니. 우리 같은..

혼불 1권 (22)

"지금껏 아무 일 없이 몇 백 년을 살아왔는데, 대대로 조상께서도 안하신 일을 어머니께서 왜 시작하려 하십니까?" 청암부인은 웃었다. "그보다 더 몇 백 년 전에는 저 방죽마저도 없었느니라. 그냥 민틋헌 산기슭이 었지."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누군가 거기 처음으로 지맥을 끊고 삽을 댄 사람이 있었겠지. 그 사람도 몇 백 년 세월 동안 아무도 안한 일을, 조상께서도 안한 일을 했을 것이니라." "그렇지만 어머니, 선대 어르신네분께서 이 마을에 저수지 필요한 일을 왜 모 르셨겠습니까? 뜻이 있어도 일의 절차가 그만큼 어려우니, 손을 못 대신 게 아 닐까요." "쉬운 일은 아니다." "살던 집터의 울타리만 고칠려고 하여도 계획이 서야 시작을 하는 것이온데, 하물며 그런 큰 일을 어떻게 어머니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