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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30) -채만식-

계봉이는 승재가 생각하기에는 속을 알 수 없게 뾰롱한다. “애기가 좋잖어” “좋긴 무에 좋아? 어른들 축에도 못 끼는걸.” “어른이 좋은 게 아냐…… 그리지 말구 이거 봐요, 계봉이” “응” “저어, 계봉이 말야…… 내 누이동생이나 내자쿠” “누이동생? 오빠 누이 그거” 계봉이는 말끄러미 승재를 올려다보다가 별안간, “……싫다누!” 하면서 아주 얀정없이 잡아뗀다. 생각잖은 무렴을 보고서 승재는 얼굴이 벌개진다. “싫여” “응, 해애.” 계봉이는 그렇게까지 안 해도 좋을 것을 너무 매몰스럽게 쏘아 준 것이 미안했던지, 제라서 배시시 웃는다. “왜 싫으꼬” “왜…… 응, 거저.” “거저두 있나? 이유가 있어야지.” “이유? 이윤…… 응!…… 없어 없어.” “없는 게 아니라, 아마 계봉인 남서방이 싫은 게지?..

<R/B> 탁류 (29) -채만식-

계봉이는 기어코 한마디 조롱을 하고서는 웃어 대다가 다시, 구누나 하는 것처럼 소곤소곤, “……그리구우, 어디루 가는지 집만 아르켜 주믄 내가 인제 찾아갈게, 응…… 꼬옥 레포할 재료두 있구…….” 승재는 종이쪽에다가 이사해 가는 집 번지를 쓰고, 길목이며 드나드는 문간까지 알기 쉽게 대주면서, 앞으로 밤에 급한 병자가 있는 집에서 부르러 오든지 하거든 그대로 잘 가리켜 주라는 부탁을 얼러서 당부한다. “내일이라두 봐서 가께? 여섯시쯤…….” 계봉이는 승재가 주소 적어 주는 종이쪽을 받아 들고 훑어보다가 허리춤에 건사를 한다. “……우리 남서방 우-라- 하하하하…… 내일 기대리우” 계봉이는 승재가 저희 집에 그대로 끄먹끄먹 앉아 있지 않게 된 것이 좋기도 했거니와, 그보다도 승재가 딴 데 가서 있으면 놀..

<R/B> 탁류 (28) -채만식-

“그럴 수는 없어요! 절대루…….” “그래두 그래선 안 됩니다. 첫째 환자 당자한테두 해롭구, 또 부인한테두…….” 승재는 여기까지 말을 하느라니까, 어느덧 그만 가슴이 뭉클하면서 사뭇, ‘아이구우!’ 하고 소리쳐 부르짖기라도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다. 그는 초봉이가 이자에게 짓밟혀 더러운 ××까지 전염받을 일을 생각하면, 방금 신성(神性)이나 모독되는 것 같아서 사뭇 열이 치달아 올랐다. 그는 열이 나는 깐으로 하면, 그저 주먹을 들어 이자를 대가리에서부터 짓바수어 놓고 싶었다. 눈치를 먹는 줄도 모르고 태수는 앉아서 조른다. “그러니깐 그걸 상의하는 게 아닙니까? 근치되는 거야 어렵다구 하더라두 위선 임시루 아프지나 않구, 또 전염이나 안 되게시리…… 가령 농이 멎게 한다던지…….” “물론 그렇게..

<R/B> 탁류 (27) -채만식-

선뜻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승재는 제 스스로도 의외로워할 만큼 가슴의 격동이 대단했고, 그것이 자연 얼굴에까지 나타나지 않질 못했다. 그렇듯 격동을 받아 놀라다가, 그는 이다지도 놀랄까 싶어, 그것이 또한 놀랍기도 했거니와 퍼뜩 다른 생각이 들면서 그만 계봉이를 보기에도 점직해, 얼른 기색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시치미를 뗐던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그가 별안간에 의지력이 굳센 초인(超人)이나 어진 성자(聖者)가 된 때문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계봉이가 흘개가 빠졌다고 지천을 하는 꼭 그대로, 주변성도 없고 저를 떳떳이 주장하지도 못하고 일에 겁(怯 : 내성)부터 내는 솜씨라, 가령 오늘 밤만 하더라도 선뜻, 아뿔싸! 내가 남의(초봉이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서…… 괜히 속없는 요량을…… ..

<R/B> 탁류 (26) -채만식-

그는 지금부터라도 제가 슬그머니 뒤로 나서서 태수의 뒤밑을 들추어 내어 이 혼인이 파의가 되게시리 훼방을 놀아 볼까 하는 생각을 두루두루 해보기까지 했다. 마침 음식 분별이 다 되었던지, 그새 안방과 부엌으로 팔락거리고 드나들던 김씨가 행주치마에 가뜬한 맵시로 앞 쌍창을 크게 열더니, 방 안을 한번 휘휘 둘러본다. 음식상을 어떻게 들여놓을까 하는 참이다. 태수는 약혼반지 곽을 꺼내서 주먹에 숨겨 쥐고 김씨한테 흔들어 보인다. 약혼을 한다고 모여 앉기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약혼인지 알 사람도 없거니와, 분별을 할 사람도 없어, 음식상이 들어오도록 약혼반지는 태수의 포켓 속에 가서 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령 결혼식이라면 명망가라는 사람을 청해 오든지 목사님을 모셔 오든지 했겠지만, 그럼 ..

<R/B> 탁류 (25) -채만식-

이렇듯 초봉이로서는 이 판이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땅재주를 넘는 살판인데, 별안간 서울 가자던 것이 와해가 돼 단지 서울을 가지 못하는 것 그것만 해도 큰 실망인데, 우황 고태수라니! 마침내 승재를 갖다가 한편 구석으로 밀어 젖히고서, 제가 어엿하게 모친 유씨의 옹위까지 받아가면서 이마 앞으로 바로 다가선 그 고태수! 초봉이는 모친이 말을 묻는 것도 잊어버리고, 저 혼자서, 시방 태수라는 사람이 던지는 그물에 옭혀 매어 옴나위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도 어느덧 방그레니 웃으면서 그한테 손을 내미는 제 자신을 바라보다가, 깜박 정신이 들어 다시금 몸을 바르르 떤다. 유씨는 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잠깐 만에 다시, “그 사람 말이, 너를 안다구 그리구, 너두 자기를 알 것이라구 그리더란다.” 하면서 이야기..

<R/B> 탁류 (24) -채만식-

“글쎄 우릴 만만히 보구서 그러는 게 아니냐? 대체 어째서 가자구 했다가 이제는 오지 말란다더냐…… 답답하다. 속이나 좀 알자꾸나” “나도 몰르겠어요…… 그냥 오지 말라구 그리니깐…….” 초봉이는 곧은 대답을 않고 있다가 종시 모른다고 하고 만다. 그는 아까 저녁때 당하던 그 일을 모친한테고, 남한테고, 제 낯이 오히려 따가워서 말하기조차 창피했다. 저녁때 다섯시가 얼마 지나서다. 바쁜 일이 없어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제호지만, 요새 며칠은 정말 바빠서, 오늘도 아침부터 몇번째 그 긴 얼굴을 쳐들고 분주히 드나들던 끝에 잠깐 앉아 쉬려니까 그나마 안에서 윤희가 채어 들여 갔다. 제호가 안으로 들어가고 조금 있더니 큰소리가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틀에 한 번쯤은 내외간에 싸움을 하는 터라, 초봉이는 그저 ..

<R/B> 탁류 (23) -채만식-

정주사는 아랫동네의 약국으로 마을을 내려가려고 벗었던 양말을 도로 집어 신으면서 유씨더러, 초봉이가 오거든 우선 서울은 절대로 보내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겸하여 이러저러한 곳에 혼처가 났으니 네 의향이 어떠냐고 물어 보라는 말을 이른다. “성현두 다아 세속을 쫓는다는데, 그렇게 제 의향을 물어 보는 게 신식이라면서” 정주사는 마지막 이런 소리를 하면서 대님을 다 매고 일어선다. “그럼 절더러 물어 보아서 제가 싫다면 이 혼인을 작파하실려우” 유씨는 그저 지날 말같이 웃음엣말같이 한 말이지만, 은연중에 남편을 꼬집는 속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변 유씨가 자기 자신한테도 일반으로 마음 결리는 데가 없지 못해서 말이다. “제가 무얼 알아서 싫구 말구 할 게 있나…… 에미 애비가 조옴 알아서 다아 제 배필을 ..

<R/B> 탁류 (22) -채만식-

“먹는 건 먹는다구 해야 하는 법이야! 또오, 젊은 사람이 술을 좀 먹기루서니 그게 대순가? 정주산 그런 건 가리잖는 분네야, 그렇잖수? 정주사…….” “허허, 뭐…….” “아녜요, 정주사…… 그인 술 별루 먹잖어요. 난 먹는 걸 못 봤어요.” “뭐, 그거야 먹으나 안 먹으나…….” “그래두 안 먹는걸요!” “난 보니깐 먹던데” “언제 먹어요” “요전날 밤에두 장재동 골목에서 취한 걸 본걸” 정주사는 실로(진실로 그렇다) 태수가 술은 백 동아리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탑삭부리 한참봉네 싸전가게를 나섰다. 그는 김씨더러 집에 돌아가서 잘 상의도 하고, 또 아무려나 당자인 초봉이 제 의견도 물어 보고, 그런 뒤에 다 가합하다고 하면 곧 기별을 해주마고 대답은 해두었다. 그러나 그런 건 인사삼아 한 말..

<R/B> 탁류 (21) -채만식-

먹곰보는 인제는 기운을 차리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퍼근히 주저앉아서 무어라고 게걸거리기만 한다. 정주사는, 승재가 그 동안 역시 이러한 일로 여러 번 봉변을 했고, 급기야 한 번은 경찰서에 붙잡혀가기까지 했었으나, 다 옳은 일을 한 노릇이기 때문에 무사히 놓여 나왔다고 구경꾼들더러 들으라는 듯이 일장 설명을 한다. 그러고는 다시 한바탕 먹곰보를 꾸짖어 가로되, “너 이 손, 그 사람이 맘이 끔찍히 양순했기 망정이지, 만일 조금만 무엇한 사람이면, 자네가 당장 죽을 거조를 당했을 테야!…… 내라두 한 나이나 더얼 먹었으면, 자네를 잡어 엎어 놓고 물볼기를 삼십 도는 치구래야 말았지, 다시는 그런 버릇을 못 하게…… 어디 그럴 법이 있나! 고현 손이지…… 이 손! 그래두 냉큼 물러가지를 못해” 마지막 정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