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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20) -채만식-

그러한 근경인 줄 아는 승재는 차차 그것을 기쁘게 받고, 그 대신 간혹 명님이네 집에를 들렀다가 끼니를 끓이지 못하고 있는 눈치가 보이면 다만 양식 한 되 두 되 값이라도 내놓고 오기를 재미삼아서 했다. 승재가 끊어다 주는 노란 저고리나 새파란 치마도 명님이는 더러 입었다. 승재는 명님이가 명님이답게 귀여우니까 귀애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명님이는 일변 승재의 기쁨이기도 했다. 그것은 승재의 그 ‘조그마한 사업’의 맨 처음의 환자가 명님이었던 때문이다. 승재는 병원에서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그 중에는 생사가 아득한 중병환자를 잘 서둘러 살려 내기도 한두번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다지 중병도 아니요 수술하기도 수나로운 명님이의 하선염을 수술해 주던 때, 그리고 그것이 잘 나았을 때, 그때의 기쁨이란 ..

<R/B> 탁류 (19) -채만식-

승재는 청진기를 떼고 물러앉으면서 이마를 찡그린다. “아직 살었나 봐요!” 먹곰보네 아낙은 어린것의 가슴에 손을 대보다가 아직 따뜻한 온기가 있으니까, 그것이 되레 안타까워 미칠 듯이 납뛴다. “……네? 아직 살었나 봐요? 어서 얼른 좀…… 아가 업동아? 업동아? 엄마 왔다. 엄마…… 젖 먹어라. 아이구 이걸 어떡해요! 어서 손 좀 대주세유!” “소용 없어요, 벌써 숨이 졌는걸!” 승재는 죽은 자식을 놓고 상성할 듯 애달파하는 정상이 불쌍한 깐으로는, 소용이야 물론 없을 것이지만, 당장이나마 원이라도 없으라고 강심제 한 대쯤 주사를 놓아 주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러나 우선 인정에 못 이겨 그 짓을 했다가는 뒤에 말썽이 시끄럴 것이니 차라리 눈을 지그시 감고 모른 체하느니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

<R/B> 탁류 (18) -채만식-

“승겁네!” “그럼 말야아, 응” 김씨는 도로 발딱 일어나더니 얼른 태수의 귀때기를 잡아다가 입에 대고, “……저어, 나아 응? 애기 하나만…….” 하면서 한편 팔이 태수의 어깨를 감는다. 그날 밤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된 뒤로부터 둘이는 그대로 눌러 오늘날까지 지내 왔다. 여덟 달이니 장근 일년이다. 탑삭부리 한참봉이야 육장 첩의 집에 가서 자곤 하니까, 태수가 달리 오입을 하느라고 바깥잠을 자는 날만 빼면, 그래서 한 달 두고 보름은 둘이의 세상이다. 식모나 심부름하는 아이년도 돈이며, 옷감이며, 다 후히 얻어먹는 게 있어, 밤이면 태수를 바깥 주인 대접을 할 줄로 알게쯤 되었기 때문에 둘이는 아주 탁 터놓고 지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참봉이 첩을 얻어 두고 어엿이 다니는 것과 일반으로, 김씨도..

<R/B> 탁류 (17) -채만식-

그날 밤 태수는 주인집의 저녁밥도 비워 때리고 요릿집에서 놀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오는 길이었다. 술이야 얼근했지만, 밤이 그렇게 마음 촐촐하게 하는 밤이니, 다니는 기생집도 있고 한 터에 그냥 돌아오지는 않았겠지만, 어찌어찌하다가 서로 엇갈리고 헛갈리고 해서 할 수 없이 혼자 동떨어진 셈이었었다. 그는 술을 먹고 늦게 돌아왔다가 탑삭부리 한참봉한테 띄면 으레 붙잡혀 앉아서 술을 먹지 말라는 둥, 사내가 어찌 몇 잔 술이야 안 먹을꼬마는 노상 두고 과음을 하면 해로운 법이라는 둥, 이런 제법 집안 어른 노릇을 하자고 드는 잔소리를 듣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가시어, 살며시 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었다. 태수는 그래서 사푼사푼 마당을 가로질러 뜰아랫방으로 가노라니까 공교히 안방에서, “고서방이우” 하고 ..

<R/B> 탁류 (16) -채만식-

행화는 돈에는 주의도 하지 않고 입술에다가 루즈칠만 한다. “빨리 빨리!” “서두는 게 오늘 밤에 또 울어 뒀다, 고주사.” “미쳤나! 내가 울긴 왜 울어” “말두 마이소. 대체 그 초봉이락 하능 기 뉘꼬…… 예? 장주사는 알지요” “알기는 아는데 나두 상판대기는 아직 못 봤네.” 행화는 제중당에 있는 그 여자가 초봉인 줄은 모른다. 모르고 어느 기생으로만 알고 있다. “오늘 좀 불러 봤으면 좋겠다!…… 대체 어느 기생이길래 고주사가 그리 미망이 져서 울고불고 그 야단을 하노” “허허허허.” 형보는 행화가 초봉이를 이름이 그럴듯하니까 기생인 줄만 알고 그러는 것이 우습대서 껄껄거리고 웃는다. 태수도 쓰디쓰게 웃고 섰다. “예? 고주사…… 난두 기생이니 오입쟁이로 내 혼자만 차지하자꼬마는, 그러니 강짜를 ..

<R/B> 탁류 (15) -채만식-

첫째, 그는 제가 제 손수 무슨 농간을 부리든지, 혹은 누구를 등골을 쳐서든지, 좌우간 군산을 떠나 북쪽으로 국경을 벗어날 그 시간 동안만 무사할 돈이면, 돈 만 원이고 이삼만 원이고 상말로 왕후가 망건 사러 가는 돈이라도 덮어놓고 들고 뛸 작정이다. 뛰어서는, 북경으로 가서 당대 세월 좋은 금제품 밀수(禁制品密輸)를 해먹든지, 훨씬 더 내려앉아 상해로 가서 계집장사나, 술장사나, 또 두 가지를 겸쳐 해먹든지 하자는 것이다. 그는 재작년 겨울, 이 군산으로 옮기기 전에 한 반년 동안이나 상해로 북경으로 돌아다닌 일이 있었고, 이 ‘영업목록’은 그때에 얻은 ‘현지지식(現地知識)’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돈 만 원이나 올가미를 씌울까, 육장 궁리가 그 궁리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처럼 형무소가 덜..

<R/B> 탁류 (14) -채만식-

그랬길래 그가 이 군산지점으로 내려와서 기를 탁 펴고 지내게 되자, 지금까지는 금해졌던 흥미의 대상인 유흥과 계집이 상해(上海)와 같이 개방되어 있는 그 속으로 맨먼저 끌려 들어간 것이다. 그는 마치 아이들이 못 보던 사탕을 손에 닿는 대로 쥐어 먹듯이 방탕의 행락을 거듬거듬 집어먹었다. 믿는 외아들 태수가 이 지경이 된 줄 모르고, 그의 모친은 그가 인제는 어서 바삐 장가나 들어 살림이나 시작하면 그를 따라와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려니, 지금도 매일같이 그것만 기다리고 있지, 천석거리 과부란 당치도 않은 소리다. 태수는 지난 사월에 그처럼 사세가 절박해 오자 두루 생각한 끝에 마루나의 육백 원 소절수를 또 만들어 그 돈으로 미두를 해본 것이다. 전에도 가끔 오백 석이고 삼백 석이고 미두를..

<R/B> 탁류 (13) -채만식-

갸쿠다마리의 얼굴들은 대번 금을 그은 듯이 두 갈래로 갈려 버린다. 판 사람들은 턱을 내밀고서 만족하고 산 사람들은 턱을 오므리고서 시치름하고, 이것은 천하에도 두 가지밖에는 더 없는 노름꾼의 표정이다. 이처럼 시세가 내리쏟기자 태수의 친구요 중매점 마루강(丸江)의 바다지인 곱사 형보는 팽팽한 이맛살을 자주 찌푸리면서 손에 쥔 금절표를 활활 넘겨본다. 사각 안에다가 영서로 K자를 넣은 것이 태수의 마크다. 육십 원 증금(證金)으로 육백 원에 천 석을 산 것인데, 인제 앞으로 십 정만 더 떨어져서 이십구 원 팔십팔 전까지만 가면 증금으로 들여논 육백 원은 수수료까지 쳐서 한 푼 남지 않고 ‘아시(證金不足)’이다. 형보는 잠깐 망설이다가 곱사등을 내두르고 아기작아기작 전화통 앞으로 가더니 옆엣사람들의 눈치를..

<R/B> 탁류 (12) -채만식-

영감님은 그 돈 만 원을 송두리째 어느 중매점에다 맡겨 놓고, 미두 공부를 기역 니은(미두학 ABC)부터 배워 가면서 일변 미두를 했다. 손바닥이 엎어졌다 젖혀졌다 하고, 방안지의 계선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동안에 돈 만 원은 어느 귀신이 잡아간 줄도 모르게 다 죽어 버렸다. 영감님은 여관의 밥값은 밀렸고,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은 몰라도) 찻삯이 없었다. 중매점에서 보기에 딱했던지, 여비나 하라고 돈 삼십 원을 주었다. 영감님은 그 돈 삼십 원을 받아 쥐었다. 받아 쥐고는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후유- 한숨을 쉬더니 한숨 끝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죽었다. 이것이 군산 미두장을 피로써 적신 ‘귀중한’ 재료다. 그랬지, 아무리 돈을 잃어 바가지를 차게 되었어도 겨우 선창께로 어슬렁어슬렁 걸..

<R/B> 탁류 (11) -채만식-

“저녁? 응, 해서 지금들 먹는 참이구. 그래서 본인두 어서 들어가서 진지를 자셔야지, 생리학적 기본요구가 대단히 절박해!” “저어, 이거 갖다가…… 응” 우물우물하더니 지전 한 장, 오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슬며시 밀어 놓는다. “……어머니나 아버지 디려요. 아침 나절에 좀 변통해 볼려구 했지만 늦었습니다구.” 계봉이는 승재가 오늘도 아침에 밥을 못 하는 눈치를 알고 가서, 더구나 방세가 밀리기는커녕 이달 오월 치까지 지나간 사월달에 들여왔는데, 또 이렇게 돈을 내놓는 것인 줄 잘 알고 있다. 계봉이는 승재의 그렇듯 근경 있는 마음자리가 고맙고, 고마울 뿐 아니라 이상스럽게 기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얼굴이 꼿꼿하게 들려지지 않을 것같이 무색하기도 했다. “이게 어인 돈이고” 계봉이는 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