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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혼불 5권 지은이:최명희 출판사:한길사   1. 자시의 하늘  자시가 기운다. 바람끝이 삭도같은 섣달의 에이는 어둠이, 잿빛으로 내려앉는 겨울 저녁의 잔광을 베어 내며, 메마른 산과 산 능선 아래 움츠린 골짜기로 후벼둘고 헐벗은 살이 버슬버슬 얼어 터지는 등성이와 소스라쳐 검은 뼈대를 드러낸 바위 벼랑 허리를 예리한 날로 후려쳐 날카롭게 가를 때, 비명도 없이 저무는 노적봉은 먹줄로 금이 간 몸 덩어리를 오직 묵묵히 반공에 내맡기고 있었다, 어둠의 피는 검은가. 휘이잉. 칼날의 서슬이 회색으로 질린 허공에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노적봉 가슴패기에 거꾸로 꽂히자, 그 칼 꽂힌 자리에서는 먹주머니 터진 듯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져 났다. 바람이 어둠이고, 어둠이 난도였다. 어지러이 칼 맞은 자리마다 언 ..

혼불 5권 (44)

얼굴이 고우면 무엇하고 태깔이 있으면 무엇에 쓰랴. 사내로 세상에 나서 반듯하게 책상다리 개고 앉아,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경세제민, 공부를 한 번 해 본 일도 없고, 그것이 아니라면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온뭄에 땀흘리며 구리 같은 팔뚝으로 논을 갈고 밭을 갈아 농사를 지어 본 일도 없고, 쇠푼 한 닢이라도 더 벌어서 돈궤를 무겁게 채우는 기쁨으로 무슨 장사를 해 본 일도 없이, 그저 한세상을 제 아낙의 뒷전에서 이런 저런 굿판의 치다꺼리를 하며, 허구한 날 기껏해야. 사람 사는 세상의 땅 어디에도 부빌 곳 없는 마음을 검은 강, 검은 하늘 너머, 구천에서 맴도는 귀신한테다 메인 목을 놓아 부벼 보니. 아, 세상이 이렇게도 허한 것인가. 전에 홍술이는 쉬혼에야 얻은 자식 만동이의 조그만 낯바닥..

혼불 5권 (43)

"아부지, 나는 크먼 나중에 머이 된당가?' "너도 나맹이로, 인자 각시를 얻으면 무부가 되제잉." "당골 각시 안 얻으먼?" "안 얻을 수가 있간디? 당골네 집안은 꼭 당골네 집안끼리만 시집가고 장개가고 혼인을 허는 거이여, 그거이 벱이여." 무당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과는 혼인할 수 없다고,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당골네 무당의 집안끼리 무계혼만을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을 낳으면 훗날 그는 무부가 되고, 딸을 낳으면 무녀가 되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자 살어 보그라. 살자먼 설운 일 많은 거이 한세상이라, 여늬 사람도 이 세상을 진세상이라고, 울고 울어서 질퍽헌 세상이라고, 눈물이 젖어서 무겁다고 허는디, 조선 팔도에 팔천 사천 무..

혼불 5권 (42)

11. 나 죽거든 부디 투장하여 달라  버석. 버스럭.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가 음습한 주홍의 등잔 불빛이 번진 방안에 오싹할 만큼 커다랗게 울린다. 그것은 불빛이 구겨지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무명씨 기름으로 밝힌 등잔의 불빛은 그 주홍에 그을음을 머금고 있어. 됫박만한 방안의 어둠을 환하게 밀어낸다기보다는 오히려 벽 속에 스민 어둠까지도 깊이 빨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주홍을 내쉬고 어둠을 삼키는 등잔불 혓바닥이 제 숨결을 따라 팔락. 파르락. 흔들린다. 그 불빛을 받으며 등잔 아래 숨을 죽이고 앉아. 무엇인가를 창호지로 싸고 있는 당골네 백단이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후드르르 떨린다. 어두운 불 그림자가 흰 창호지에 검은 손가락 무늬를 드리운다. 버스럭. 버스럭. 뭉치가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

혼불 5권 (41)

둥. 둥. 둥. 둥. 조리를 돌리거나 회술레를 시킬 때는. 북을 쳐서 모두 알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만인의 손가락질과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것으로 벌이 끝나지만. 다른 집도 아니요. 원뜸의 세도 문중 종갓집에 든 도둑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이 치도곤이를 당한 그날로 마을에서 당장 쫓겨나고 말 일이었다. 이 마을에 붙어 있어 누가 특별히 보살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흉흉하고 살벌한 타지. 생전에 나가 본 일이 없는 마을 바깥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평소에도 그는 엄두가 안 났었다. 더구나 지금 굶어 죽어가는 자식들과. 아이 막 낳은 아낙과 핏덩이를 데불고. 만일 쫓겨난다면 동구밖을 다 못 나가 길거리에서 죽게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살려 줍시오." 부서방은 비쩍..

혼불 5권 (40)

"만주로 가거라." "그곳에 가면 임자 없는 땅이 지천이다. 누구든지 먼저 가서 말뚝 박고 개간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 땅 되느니. 만주로 가거라. " 일본에서는 그렇게 충동질하였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부여대로. 사내는 이불 보퉁이를 뚤뚤 뭉쳐 등에 지고 아낙은 다 떨어진 옷 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인 채. 바가지 덜렁거리며 만주로 마주로 흘러갔던가. 그런 총중에 총독부는 일본의 영농 인구가 대량 출정하여 감소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방편으로 '농업보국청년대'를 조직하고. 조선인들한테 "진보된 영농법을 견학 실습시켜 준다." 는 구실을 내세워 매년 봄.가을로 두 차례씩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일손이 가장 바쁜 농번기 모내기철과 추수철에 나라. 사가. 미에와 그 외의 다른 ..

혼불 5권 (39)

하는 말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말 수도 있지만. 칼 찬 순사가 집안으로 들이닥쳐 쟁기에 박힌 보습을 빼 가며. 부엌에 걸린 가마솥까지 모조리 뜯어 가는 데는 하도 기가 막힌 끝에 차라리 얼이 빠져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거기다가 놋그릇은 물론이고 숟가락. 젓가락. 제기까지 남김없이 뒤져 내어 훑어 가는 데는. 이것이 순 날강도지 인성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는 도저히 없었다. "철은 갖다가 녹여서 비행기 맨들고. 놋그릇. 숟가락. 제기는 갖다가 녹여서 총알 탄피를 맨든다대. 참 무신 노무 세상이 환장을 해도 유분수제. 밥상으 밥그륵이 총알이 되고 밥먹든 숟구락이 탄피가 되야. 긍게. 미쳤제. 미쳐. 눈꾸녁들이 삐이래 갖꼬." "호성암 부체님은 끄집혀 가서 시방 비행기가 ..

혼불 5권 (38)

청암부인은 이기채에게 그렇게 일렀다. "내 젊어서는 혼자몸으로 눈앞이 캄캄하여 살림을 이루노라고. 남한테 모질고 독한 소리도 많이 들었다마는. 그것은 한때라. 종내 그렇게 모으기만 한다면 그것이 도척이지 사람이겠느냐.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만 허게 되었으니 나눌 줄도 알어야지 싶어지고. 또 내 앞에 모이고 쌓인 재물이 다 내것이 아니라 남의 것 눈물나게 억지로 빼앗은 것도 있지 싶어져서. 하늘이 무섭고 사람이 가여워 무엇으론가 갚어야 가벼이 될 것만 같았더니라. 이제는 전답이 무거워. 눈물이 무겁다……. 굳이 좋게 생각허자면. 내가 남보다 좀 치부한 것은 하늘이 내 능력을 믿고. 여러 사람 쓸 것을 나한테 한 번에 맡기어 심부름 시키는 것이라고. 고지기 시키신 것이라고나 헐까. 나는 그러니. 곳간의 쇳대..

혼불 5권 (37)

"들렀다 가지 뭐. 잠깐." "율촌형님 근력이 이번 설 쇠고는 눈에 띄게 노인 되셨드마는." "하루가 무섭지. 인제부터야. 무슨 기가 맥히게 좋은 일이나 생긴다면 또 모를까. 크는 어린애 오뉴월 하루 햇볕이 무섭듯이 나이 자신 노인네 하룻밤새가 무서운 법 아닌가. 거기다가 근심이 댓진같이 꽉 차있는데……." "청암백모님 상당허시고는 그만." "초상도 초상이지만. 집 나가서 안 오는 자식을 두고 그것도 참 여느 자식허고 같은 아들인가. 잠이 올까 밥이 넘어갈까 그 정황을 생각허면 내가 도무지 죄 지은 것 같어서. 그 형님한테 어디 몸 둘 바를 모르겄네. 정말로." 수천댁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무겁게 가라앉은 한숨을 토했다. "그리 된 일이 형님 탓인가요. 무어. 자식도 품안에 자식이지. 다 큰 아들이 생각..

혼불 5권 (36)

10. 아랫몰 부서방  얼레에 감겨 있던 무명실을 다 풀어 검푸른 밤하늘의 한가운데로 연을 깊이 날려보내 버린 기응은 얼레를 마루 위에 내려놓고는 "풍물 치는 구경이나 잠시 허고 올란다." 하면서 뒷짐을 진 채로 사립문을 나섰다. 흰 달빛에 그림자 검은 머리가 앞을 서는데. 바깥쪽에서 그와 엇갈리어 그림자 하나가 사람보다 먼저 문 안으로 들어선다. 기표의 처 수천댁이었다. 문간에서 마주친 수숙간에 무어라고 두어 마디 나누는 소리가 달빛 속에 두런두런 들리더니 "자네. 다리 밟으러 안 갈라는가?" 마당으로 들어선 수천댁이 오류골댁한테 물었다. 대보름날 밤이면 으레 남자들은 동산으로 달맞이를 하러 가고 달불놀이를 하며 한 동아리로 어우러져 달집을 사를 때. 여자들은 마을 가까이 있는 다리로 어울려 가서. ..

Reading Books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