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93

혼불 5권 (36)

10. 아랫몰 부서방  얼레에 감겨 있던 무명실을 다 풀어 검푸른 밤하늘의 한가운데로 연을 깊이 날려보내 버린 기응은 얼레를 마루 위에 내려놓고는 "풍물 치는 구경이나 잠시 허고 올란다." 하면서 뒷짐을 진 채로 사립문을 나섰다. 흰 달빛에 그림자 검은 머리가 앞을 서는데. 바깥쪽에서 그와 엇갈리어 그림자 하나가 사람보다 먼저 문 안으로 들어선다. 기표의 처 수천댁이었다. 문간에서 마주친 수숙간에 무어라고 두어 마디 나누는 소리가 달빛 속에 두런두런 들리더니 "자네. 다리 밟으러 안 갈라는가?" 마당으로 들어선 수천댁이 오류골댁한테 물었다. 대보름날 밤이면 으레 남자들은 동산으로 달맞이를 하러 가고 달불놀이를 하며 한 동아리로 어우러져 달집을 사를 때. 여자들은 마을 가까이 있는 다리로 어울려 가서. ..

Reading Books 2024.08.17

혼불 5권 (35)

제 연이 허방하게 불티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에 불 그림자가 주황으로 일룽였다. 그러나 아까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이 대보름날 밤이면. 집집마다 멀리 날리어 앞으로 다가올 액을 미리 막으려는 액막이 연을 띄우는 것이었다. 마치 소복을 한 듯 아무 색도 입히거나 칠하지 않은 백지의 바탕이 소슬한 흰연에다 섬뜩하리만큼 짙고 검은 먹빛으로 "액" "송액" "송액영복." 을 써서. 갓 떠오르는 새 달의 복판으로 날려 보내는 이 액막이 연은 얼음같이 푸르게 비추는 정월의 달빛 속에 요요한 소지처럼 하얗게 아득히 올라갔다. 얼레에 감긴 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있는 대로 모두 풀어 그 연을 허공에 놓아 주었다. 멀리. 저 멀리 더 먼 곳으로 날아가라고. "강실이 저것이 올해 신수가..

혼불 5권 (34)

강실이는 사립문간에 선 채로 하염없이 연들의 뚫린 가슴을 올려다 보았다. 그 연들은 가슴에 하늘이 시리게 박힌 것처럼도 보였다. "왜 연에다가는 구멍을 뚫는대요?" 어린 날 강모는 그렇게 물었다. "그래야 잘 날지. 그게 바로 연의 비밀이니라." 기응은 웃으면서 대답했었다. "비밀?" "비어야 상하. 좌우. 자유 자재로 날 수 있는 것이다." 강모는 알 수 없는 말이라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봐라. 이걸 방구멍이라고 허는데." 기응은 연달을 다 깎아 한쪽으로 밀어 놓고. 깨끗한 연종이를 가로 한 번. 또 다시 세로 한 번 접어서. 각이 지게 접혀진 한가운데를 칼로 그린 듯 동그랗게 오려 냈다. 반듯하고 온전했던 하얀 백지는 그만 한순간에 가슴이 송두리째 빠져 버려 펑 뚫리고 말았다. 종이의 오장을 ..

혼불 5권 (33)

그리고 연의 몸 한가운데 세로로 내리긋는 살대 꽁숫달도 귓달같이. 위쪽은 단단하고 강하게 깎고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다듬어 나갔다. 그런 다음 끝으로 연달 중에 제일 가늘고 날렵한 허릿달을 다듬는다. "사람의 몸에서 제일 유연해야 허는 데가 어디냐? 허리지? 허리가 바르고 유연해야 몸에 균형이 잡히는 것이다. 연도 마찬가지라. 이 허릿달이 바로 연의 중심을 잡는 것이야." 이것은 그래서 다른 달의 사분지 일이나 될까 하게 가느롬히 깎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늘면 연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올라가지 않고. 또 너무 굵으면 뱅글뱅글 허공에서 헛맴을 돌게 되니. 이 미세하고 정확한 무게와 흐름을 저울에 달거나 눈금으로 재 가며 깎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세월이 묻은 손끝으로 익숙하게 가늠하..

혼불 5권 (32)

9. 액막이 연  강실이가 문장어른 댁에서 나와 오류골댁 사립문간으로 막 들어서려할 때. 그네의 등뒤로 엇비켜 꺼북하고 허수름한 남정네 하나가. 그네를 보고 공대하여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며 지나갔다. 아랫몰 타성 부서방이었다. 나이 오십에 조금 못 미친 그는 꼬지지한 무명 조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비쩍 마른 어깨를 치켜 모가지에 잔뜩 웅크려 붙이고는 위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설을 쇠면서도 입던 옷 빨아 새로 짓는 것조차 변변히 하지 못한 그의 머리 뒤꼭지가 마치 재를 섞어 쑤석쑤석 비벼 놓은 것처럼 반백으로 스산한데. 초장에 진즉 머리를 깎아 버린 탓으로 더욱 그렇게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머리 너머로는 티 한 점 없이 새파랗게 트인 정월의 빙청 하늘에. 크고 작은..

혼불 5권 (31)

"어. 시끄럽네. 지가 헌 말은 생각을 못허고. 소가지라고 꼭." 오금박는 목소리로 쥐어박는 임서방 말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지만. 임서방네는 강실이 혼수 화장품 말을 꺼냈다가 들은 이야기라. 혼자 머리 속으로 그 이야기에 나오는 큰애기와 강실이를 섞바꾸어 세워 놓아 보았다. 인연은 모르는 거이라는디. 하면서. 왜 그랬는지 그네는 강실이가 아주 가련하게도 집에서 내쫓기어 수악한 머슴한테로 시집을 간다면 누구한테로 가며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도무지 거짓말로라도 그 모습을 떠올려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네는 되작되작 원뜸의 종가에 있는 상머슴에서부터 매안 마을 집집마다 한 집씩 더듬어 가며 상머슴. 중머슴. 물담살이. 깔담살이. 그리고 노비들..

혼불 5권 (30)

험서 옆에 나란히 누워 온갖 소리로 세세허게 달래고 소청을 히여. 그러고는 이불을 떠들고 같이 자자고 들올라고 허네. 김도령이 아까맹이로 이불을 움켜쥐고 안 놈서 못 들오게 히여. 큰애기를 그렁게 큰애기는 그러지 마시라고 제가 어머이 잘 모시고. 효도도 헐 거잉게 마음을 돌리시라고 빌었제. 그래서 이불을 못 벳겨. 김도령이 안 벗어. 캉컴헌 이불 속으서 똑 숨이 맥혀 죽겄는디 지침도 못허고. 메주 띄우디끼 잔득허게 몸뗑이를 띄움서 참고 있능 거이라. 큰애기가 아무리 애원을 해도 쇠용이 없어. 큰애기는 즈그 아부지를 생각해서 어쩌든지 새어머이 마음을 돌려 볼라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이제. 근디 안되야. 새복녘이 다 되드락 땀이 나게 공을 딜이다가. 해도 해도 안된게 지쳐 갖꼬 큰애기가 기양 그 옆으서 꼬..

혼불 5권 (29)

그리고 어머니가 건네주는 병을 받아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우데나' 도마도 화장수였다. 병 모양이 마치 도마도 같아서 붙은 이름이리라. 안개로 빚은 유리병인가. 볼그롬한 살구꽃빛 연분홍 화장수가 애달플 만큼 곱게 비치는 병의 앙징스러운 뚜껑은 노랑색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수줍은 봄을 맞이한 꼬막각시 같은 병의 조그만 모가지에는 진초록 이파리를 종이로 만들어 실을 달아 걸어 놓았다. 네가 이대도록 고와서 무엇에다 쓸거나. 강실이는 저도 모르게 그 빛깔에 물들면서 한숨을 지었다. 웬만한 집안의 처자는 혼수품으로 반드시 장만한다는 방물장수의 말이 아니라도 이처럼 어여쁜 화장품이라면 누가 탐내지 않으랴. 그러나 그것은 어여뻐서 오히려 한없이 서럽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손안에 들고 있으면서도 아득..

혼불 5권 (28)

강실이가 초사흘을 넘기고 동계어른 이헌의에게 세배를 하러 갔을 때. 마침 한 무리의 집안간 동종들이 먼저 왔다 돌아가고 그의 재종 이징의만이 헌의와 사랑에 대좌하여 담소하고 있었다. "그래 올에는 부디 몸도 충실허고 마음먹은 대로 모든 소원을 다 성취허도록 해라." 세배를 받는 이헌의는 그 앞에 다소곳이 앉는 강실이를 보고 고희를 넘긴 지 여러 해 된 노안에 실뿌리같이 드리워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머금은 음성으로 덕담을 해 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붙였다. "꼭 시집도 가고." 이 말에 강실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수그렸다. "가만 있자. 네가 인제 올에 몇 살이더라? 무슨 생이던고?" 나이를 묻던 그는 손가락을 짚어 보고는 잠시 침묵하였다. "농사도 때가 있고 인사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실..

혼불 5권 (27)

"그 이야기에서도 나름대로 건질 것은 있으나 역사를 거꾸로 더듬어 유추해 보면 전혀 다른 면이 확연히 잡힌다. 우선 무왕이 누구인가 보자. 그는 백제 제이십구대 법왕의 아들이요 제삼십대 의자왕의 아버지인데. 그의 아버지 법왕 시대에 백제는 그 당시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한 나라였어. 그래서 법왕 시절에 영토 확장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지. 그래서 자연히 신라 변방을 많이 치게 되었는데 신라로서는 괴로운 일이지. 이때 백제 법왕은 후손에 왕통을 이을 적자가 없었다. 무왕은 서손이었어. 그러니까 법왕이 마한족의 여인을 비로 맞이하여 낳은 아들이 백제 무왕이었지. 물론 어려서야 아직 무왕이 아니지만. 그는 서자였기 때문에 그때 사비성에 살지 않고 자기 어머니인 마한족이 살던 이리 익산 옆 금마성에 어머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