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24

혼불 6권 (48)

진의원은 뒤로 나자빠질 뻔하였다. 그 놀라는 모양을 말끄러미 보더니 비오리는 병의 전말이 짐작 간다는 듯 고개를 혼자 주억거렸다."너 베락 맞을래?""그른 말 했으먼 베락을 맞을 거이고 안 그러먼 안 맞겄지맹.""사람 일을 그렇게 경망시럽게 말허는 것 아니다. 암만 농담이라도. 농담 끝에 살인난단 말. 듣도 못했냐?""아 누가 농담을 헌당가요?""그러먼 거 먼 소리여?""몰라서 묻는다요? 금방 자개가 다 말해 놓곤.""내가 무슨 말을 해?""이이고오, 의원님. 입으로 허는 말만 말잉기요? 눈짓도 말이고. 낯색도 말이고, 목청도 말이고, 손짓 발짓 몸짓에다 제절로 풍겨지는 탯거리도 다 말 아니요? 내가 머 청맹과니 봉사간대 지 눈구녁으로 본 말도 못 알어들으께미? 아 의원님은 머 누가 아푸다고 따악 와서 ..

혼불 6권 (47)

"암만해도 이건 태맥이라......."그러고는 차마 무어라고 더 덧붙이지 못하면서 겨우 "비장이 몹시 말러서, 제가 보중익기탕을 한 번 써 볼랍니다. 그게 비장을 보허고 약이 닿을 것 같그만요."비장이 상허고 마른 것만으로도 강실이가 몸을 지탱하기 이미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이까지 들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앞앞이 입덧이 다 다른 마당에, 물 한 모금도 목에 못 넘기며 온 밤을 뜬눈으로 새우기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인즉. 어째 어제 아니고 오늘에야 기색하며 쓰러질 것이야. 강실이는 살았다 할까. 죽었다 할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의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우루루루, 검은 하늘이 부서져 무너지며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로, 오류골댁과 기응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그 정수리 빠개지는 소리가 진의원에..

혼불 6권 (46)

진의원이 혀를 찻다. 그러나 그네는 어느새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저런 버르쟁이."다시 진의원이 무어라 하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비오리어미가 술상을 개다리 소반에 보아 막 들고 들어오는 것이다. "야가, 야가, 야, 너 멋 허고 섰냐? 절 헐라고 그리여?"방안의 수작을 다 엿들어 알고 있는 그네가 오똑 서 있는 비오리를 나무라며, 딸년의 어깨를 눌러 주질러 앉혔다. 할 수 없이 술상 머리에 앉은 비오리한테 오리 모가지 술병을 안기고는 어미가 눈치 빠르게 제 이부자리를 붇움어 안고 저 방으로 건너가 버리자, 진의원은 술잔을 들었다. 그는 비오리어미의 반색이나 비오리의 앵돌아짐조차도 잊어 버린 듯 아까처럼 무표정으로 무겁게 잔을 들고만 있었다. 비오리가 얼른 술을 따르지 않은 까닭에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

혼불 6권 (45)

24. 진맥  "어찌 오시오?"비오리는 낭창한 치마꼬리를 한쪽으로 휘이 걷어 감으며 일어서서 진의원을 맞이하였다. 그의 탯거리에는, 한때 그의 소실이었던 흔적과 원망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토라짐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쯤은 올 줄 알기나 했던 것처럼 흔연한 기색도 배어났다. 그것은 여러 해 주모 노릇으로 닦이어, 날선 몸의 모서리가 둥그름해진 흔연함이기도 하리라. 사람의 몸에도 세월이 묻으면, 어느결에 장롱이나 반닫이에 스미는 손때 같은 것이 저절로 눅눅하게 스미어 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마음에도. 비오리는 지금 스물한 살이 아니었다. 진의원은 그런 비오리를 비스듬히 내리뜬 눈길로 바라보며 방문 앞에 흰 구두를 나란히 벗어 놓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중절모를 그네한테 건네준다. 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