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24

혼불 7권 (6)

2. 죄 많으신 그대  "작은아씨." 드디어 제방에 오른 안서방네가 그만 두말 더 할 것도 없이 덮쳐들어 강실이 허리를 휘어감고 쓰러지자, 강실이는 검불 하나 꺾이듯 안서방네 팔에 허리가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등뒤에서 또아리 감아안고, 그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쏟았다. 찐득하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오죽허시겄소. 오죽이나 허시겄소. 그렇지만 생목숨인디. 아아, 죄 많으신 생목숨인디. 너무나 가엾고, 애처롭고, 그러나 도무지 비천한 자신의 처지로는 무엇 하나 어떻게도 해 줄 힘도 없어 한없이 안타까운 강실이를 부여안은 안서방네는, 오직, 그네의 목숨만은 어떻게든 건져야 한다고 믿어. 절대로 이 팔을 풀지 않으리라. 족쇄로 조이는 것이었다. 혼비하여 달려온 끝이라 제 정..

혼불 7권 (5)

"그런데 순간 장군이 깜짝 놀랐지. 아무리 불빛 아래지만, 나비보다 고운 눈썹 위의 희고 맑은 이마에 칼자국이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러나 섬찟했거든. 아니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했단 말이요. 아깝고 참혹해라. 연유를 말해 보시오." 장군이 칼자국 까닭을 물었다. "저는 잘 모르는 일이오나, 저의 유모 말씀이, 어느 하루, 해 저무는 봄날, 버들이 푸르고 꾀꼬리 울어 꽃이 피는가 구경을 하려고, 등에다 저를 업고 대문 밖에 나섰다가, 웬 스님 한 분을 만나셨더랍니다. 그 스님이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포대기에 싸인 애기 저를 일부러 들여다보며, 이 아이가 장차 자라서, 나라를 구한 장상의 아내가 될 것이니 곱게 잘 기르라, 하시더랍니다. 황송하고 기꺼워서 유모가 합장하고 서 있자니, 웬 무장 하나가 스..

혼불 7권 (4)

그런데 그 머리 땋은 모양새나 댕기 물린 맵시, 그리고 낭자머니 비녀 지른 뒷태는 사람마다 달랐으며, 다른 만큼 흉도 되고 허물도 되고, 태깔이 하도 기품 있고 고와서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망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사람은 누구라도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실해야 한다. " "살고 난 뒷자리도 마찬가지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앞에서 보면 그럴듯해도 돌아선 뒷태가 이상하게 무너진 듯 허전한 사람은, 그 인생이 미덥고 실하지 못하다. "고도 하였다. 앞모습은 꾸밀 수도 있으마 뒷모습만큼은 타고난다는 뜻도 있으리라. "사람 귀천은 뒤꼭지에 달려 있느니." "뒷모습은 숨길 수가 없다. " 또 그렇게도 말했다. 이는 관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상이 불여후상이라."고 하여, 사람의..

혼불 7권 (3)

"네가 다시는 똑같은 일로 두 번 말을 안 들을 자신이 있을 때까지 남이 알까 두려우니, 이 골방에서, 문도 열지 말고 옴짝도 말고 틀어앉어 곰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라. 과연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를. 사람이 사소한 일을 우습게 알면 결국 큰일을 그르치게 되는 법이다. 네가 이 버릇 하나 바로잡지 못하면서 자식을 낳아 기른다면 영웅 호걸 효자 열녀는 그만두고 삼동네 천덕꾸러기 만들기 딱 알맞지. 또 네 손에 밥 얻어먹고 옷 얻어입는 네 남편은 무엇이 되리요." 며느리는 선비가 머리에 정자관을 높이 세워 받쳐 쓰듯이,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버선 두 짝을 겹쳐 꿰어 거꾸로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버릇만은 고쳐졌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의 우직하고 민첩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 그 뒤로..

혼불 7권 (2)

"아니, 너, 그 치맛자락 좀 들어올려 봐라." 기겁을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 발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라자, 새각시는 아무 생각 없이 두 손으로 다홍치마 양자락을 잡고 버선발이 드러나게 들어올렸다. "너 그게 버선이냐 쌀자루냐." 외씨같이 좁고 곱게, 흰 이처럼 드러나야 할 새각시 수줍은 버선발은 아닌게 아니라 펑퍼짐하고 야문 데 없이 헤벌어져 있었다. 그나마 수눅을 서로 왼쪽 오른쪽 뒤바꾸어 신고 있었으니. "아이고, 나, 이런 일이 어떻게 있다냐. 너 그러고 어디 가서, 이 집 며느리요오,입도 뻥끗 하지 마라. 대관절 너 어느 것 어느 댁에서 살다가 시집온 애기씨냐아. 응? 내가 아무래도 큰 실수 했는가 보다. 성씨 보고, 가문 보고, 집안간에 오가는 말 나무랄 데가 없어서 흔연 성례했더니만, ..

혼불 7권 (1)

혼불 7권  1. 검은 너울  "무릇 남자가 여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간사하고 혹은 연약해서 요사스러운 짓을 많이 하고, 여자가 남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사납고 혹은 잔인해서 일찍 과부가 되는 사람이 많아, 본디의 음양 풍수가 서로 뒤집히고, 명수가 각각 어그러지기 쉽다고 했느니." 그것이 어느 해 정초였던가, 청암부인은 큰방에 그득히 모여 않은 문중의 부인들과 담소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며느리 율촌댁이 담옥색 명주 저고리에 물 고운 남빛 끝동을 달아 자주 고름 길게 늘인데다 농남색 치마를 전아하게 부풀리고 단정히 앉아 시어머니 청암부인을 가까이 모신 좌우에 담황색 저고리, 등록색 치마, 진자주 깃 고름에 삼회장 저고리, 짙고 푸른 치마에 담청색 은은한 저고리며 북청색 치마에 녹두 저고리, ..

혼불 6권 (52. 完)

"다 해도 죽인다는 말은 마시오. 부모 말이 문서라는데.""문서 아니면 저년이 살어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만 알고 나만 알고 감쪽같이 숨겨질 일이라면 나도 귀신을 꾀어서라도 감추어 보고 싶지마는, 그렇게 될 일이 아니잖은가 말이오. 벌서 우리말고도 진의원이 아는데다, 그 입은 또 어떻게든지 막어 본다 허드라도 저 배를 어쩔 것인가. 저 배를"거기까지 말하던 기응이, 다시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가누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갑자기 아까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처참한 배신감에 휩사인 그의 턱이 덜덜 떨린다. 그의 전신을 뒤집으며 어오르는 것이 증오인지. 억울함인지, 원통함인지, 그는 가릴 수가 없었다. 그 뒤범벅을 모조리 뒤집어쓰고도 다른 말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오욕스러움이 기응을 사로..

혼불 6권 (51)

""앵두네?"기표는 칼침 꽂는 음성으로 안서방네 말을 다잡아 되받았다."갔다가 기양 저물엇그만이요.""참 한가한 사람이로구만. 오늘 저녁에 집안 우환이 있었는가 보든데. 무슨 정신에 아랫몰까지 마실을 다닐 수 있는고? 암만 종이라고 심정 스는 것이 그래 가지고서야."기표는 못박는 소리를 뱉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었으나 일부러 그처럼 모진 말을 한 것은, 혹 그 말을 듣고 욱성이 치밀어 억울한 김에 어떤 엉뚱한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린 일침이었다. 아무래도 안서방네 기색이 어디 한들한들 마실 갔다 오는 사람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또 안서방네는 그렇게 밤 이슥한 시각에 삼경이 가깝도록 놀러 다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는 처지여서 기표는 내심 수상쩍게 생각한 것이다. ..

혼불 6권 (50)

"이리 못 나와?"기응의 눈에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핏발에 범벅이 된 불똥은 멍든 자주색으로 엉겨 튀어나오고, 단박에 강실이를 때려 죽일 것만 같은 주먹을 부르쥔 채 치켜든 팔을 공중에서 떨고 있는 기응의 모습은, 보통때 단 한 번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신음소리마저 내지 못하는 강실이의 좁은 등을, 엉거주춤 네 발로 엎드리어 어미몸으로 덮고는, 고개를 틀고 기응을 올려다보며 눈으로 애원하는 오류골댁 모습은 한 마리, 새끼를 감산 어미 개 형국이었다. 그것은 가련하고 처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응은 그런 오류골댁을 끄집어 밀어 내동댕이치고, 다시 한 번 그 주먹을 내리친다. 퍽." 말을 해라."비명도 없이, 혼절한 듯 맞고 있는 강실이를 일으켜 앉힌 기응은 그네의 여윈 어깨를 잡아 흔든..

혼불 6권 (49)

25. 에미 애비  진의원이 마치 붙잡힐까 두려운 사람처럼 황황히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도망치듯 일어서 나가 버리다, 방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쩍, 소리가 나게 졸아들었다. 졸아드는 침묵이 소주를 내린다. 거꾸로 뒤집어서 전을 봉하여 덮은 가마솥 뚜껑 꼭지에서 증류로 한 방울식 떨어지는 소주같이, 침묵은 오류골댁과 기응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그것은 검은 아교였다. 아교는 떨어진 자리에 돌처럼 굳는다. 굳어 버린 아교가 바위 덩어리보다 무겁다. 무거워 고개를 떨어뜨린 강실이의 어미와 아비는 목에다 천근 돌로 만든 큰칼 둘러 쓴 죄인들마냥, 짓눌린 어깨를 웅크린 채, 눈썹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손 발끝 머리카락 끝까지도 거멓게 굳어 버린 것 같기도 하였다. 숨조차 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