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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24) -채만식-

“글쎄 우릴 만만히 보구서 그러는 게 아니냐? 대체 어째서 가자구 했다가 이제는 오지 말란다더냐…… 답답하다. 속이나 좀 알자꾸나” “나도 몰르겠어요…… 그냥 오지 말라구 그리니깐…….” 초봉이는 곧은 대답을 않고 있다가 종시 모른다고 하고 만다. 그는 아까 저녁때 당하던 그 일을 모친한테고, 남한테고, 제 낯이 오히려 따가워서 말하기조차 창피했다. 저녁때 다섯시가 얼마 지나서다. 바쁜 일이 없어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제호지만, 요새 며칠은 정말 바빠서, 오늘도 아침부터 몇번째 그 긴 얼굴을 쳐들고 분주히 드나들던 끝에 잠깐 앉아 쉬려니까 그나마 안에서 윤희가 채어 들여 갔다. 제호가 안으로 들어가고 조금 있더니 큰소리가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틀에 한 번쯤은 내외간에 싸움을 하는 터라, 초봉이는 그저 ..

<R/B> 탁류 (23) -채만식-

정주사는 아랫동네의 약국으로 마을을 내려가려고 벗었던 양말을 도로 집어 신으면서 유씨더러, 초봉이가 오거든 우선 서울은 절대로 보내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겸하여 이러저러한 곳에 혼처가 났으니 네 의향이 어떠냐고 물어 보라는 말을 이른다. “성현두 다아 세속을 쫓는다는데, 그렇게 제 의향을 물어 보는 게 신식이라면서” 정주사는 마지막 이런 소리를 하면서 대님을 다 매고 일어선다. “그럼 절더러 물어 보아서 제가 싫다면 이 혼인을 작파하실려우” 유씨는 그저 지날 말같이 웃음엣말같이 한 말이지만, 은연중에 남편을 꼬집는 속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변 유씨가 자기 자신한테도 일반으로 마음 결리는 데가 없지 못해서 말이다. “제가 무얼 알아서 싫구 말구 할 게 있나…… 에미 애비가 조옴 알아서 다아 제 배필을 ..

<R/B> 탁류 (22) -채만식-

“먹는 건 먹는다구 해야 하는 법이야! 또오, 젊은 사람이 술을 좀 먹기루서니 그게 대순가? 정주산 그런 건 가리잖는 분네야, 그렇잖수? 정주사…….” “허허, 뭐…….” “아녜요, 정주사…… 그인 술 별루 먹잖어요. 난 먹는 걸 못 봤어요.” “뭐, 그거야 먹으나 안 먹으나…….” “그래두 안 먹는걸요!” “난 보니깐 먹던데” “언제 먹어요” “요전날 밤에두 장재동 골목에서 취한 걸 본걸” 정주사는 실로(진실로 그렇다) 태수가 술은 백 동아리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탑삭부리 한참봉네 싸전가게를 나섰다. 그는 김씨더러 집에 돌아가서 잘 상의도 하고, 또 아무려나 당자인 초봉이 제 의견도 물어 보고, 그런 뒤에 다 가합하다고 하면 곧 기별을 해주마고 대답은 해두었다. 그러나 그런 건 인사삼아 한 말..

<R/B> 탁류 (21) -채만식-

먹곰보는 인제는 기운을 차리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퍼근히 주저앉아서 무어라고 게걸거리기만 한다. 정주사는, 승재가 그 동안 역시 이러한 일로 여러 번 봉변을 했고, 급기야 한 번은 경찰서에 붙잡혀가기까지 했었으나, 다 옳은 일을 한 노릇이기 때문에 무사히 놓여 나왔다고 구경꾼들더러 들으라는 듯이 일장 설명을 한다. 그러고는 다시 한바탕 먹곰보를 꾸짖어 가로되, “너 이 손, 그 사람이 맘이 끔찍히 양순했기 망정이지, 만일 조금만 무엇한 사람이면, 자네가 당장 죽을 거조를 당했을 테야!…… 내라두 한 나이나 더얼 먹었으면, 자네를 잡어 엎어 놓고 물볼기를 삼십 도는 치구래야 말았지, 다시는 그런 버릇을 못 하게…… 어디 그럴 법이 있나! 고현 손이지…… 이 손! 그래두 냉큼 물러가지를 못해” 마지막 정주사..

<R/B> 탁류 (20) -채만식-

그러한 근경인 줄 아는 승재는 차차 그것을 기쁘게 받고, 그 대신 간혹 명님이네 집에를 들렀다가 끼니를 끓이지 못하고 있는 눈치가 보이면 다만 양식 한 되 두 되 값이라도 내놓고 오기를 재미삼아서 했다. 승재가 끊어다 주는 노란 저고리나 새파란 치마도 명님이는 더러 입었다. 승재는 명님이가 명님이답게 귀여우니까 귀애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명님이는 일변 승재의 기쁨이기도 했다. 그것은 승재의 그 ‘조그마한 사업’의 맨 처음의 환자가 명님이었던 때문이다. 승재는 병원에서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그 중에는 생사가 아득한 중병환자를 잘 서둘러 살려 내기도 한두번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다지 중병도 아니요 수술하기도 수나로운 명님이의 하선염을 수술해 주던 때, 그리고 그것이 잘 나았을 때, 그때의 기쁨이란 ..

<R/B> 탁류 (19) -채만식-

승재는 청진기를 떼고 물러앉으면서 이마를 찡그린다. “아직 살었나 봐요!” 먹곰보네 아낙은 어린것의 가슴에 손을 대보다가 아직 따뜻한 온기가 있으니까, 그것이 되레 안타까워 미칠 듯이 납뛴다. “……네? 아직 살었나 봐요? 어서 얼른 좀…… 아가 업동아? 업동아? 엄마 왔다. 엄마…… 젖 먹어라. 아이구 이걸 어떡해요! 어서 손 좀 대주세유!” “소용 없어요, 벌써 숨이 졌는걸!” 승재는 죽은 자식을 놓고 상성할 듯 애달파하는 정상이 불쌍한 깐으로는, 소용이야 물론 없을 것이지만, 당장이나마 원이라도 없으라고 강심제 한 대쯤 주사를 놓아 주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러나 우선 인정에 못 이겨 그 짓을 했다가는 뒤에 말썽이 시끄럴 것이니 차라리 눈을 지그시 감고 모른 체하느니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

<R/B> 탁류 (18) -채만식-

“승겁네!” “그럼 말야아, 응” 김씨는 도로 발딱 일어나더니 얼른 태수의 귀때기를 잡아다가 입에 대고, “……저어, 나아 응? 애기 하나만…….” 하면서 한편 팔이 태수의 어깨를 감는다. 그날 밤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된 뒤로부터 둘이는 그대로 눌러 오늘날까지 지내 왔다. 여덟 달이니 장근 일년이다. 탑삭부리 한참봉이야 육장 첩의 집에 가서 자곤 하니까, 태수가 달리 오입을 하느라고 바깥잠을 자는 날만 빼면, 그래서 한 달 두고 보름은 둘이의 세상이다. 식모나 심부름하는 아이년도 돈이며, 옷감이며, 다 후히 얻어먹는 게 있어, 밤이면 태수를 바깥 주인 대접을 할 줄로 알게쯤 되었기 때문에 둘이는 아주 탁 터놓고 지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참봉이 첩을 얻어 두고 어엿이 다니는 것과 일반으로, 김씨도..

<R/B> 탁류 (17) -채만식-

그날 밤 태수는 주인집의 저녁밥도 비워 때리고 요릿집에서 놀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오는 길이었다. 술이야 얼근했지만, 밤이 그렇게 마음 촐촐하게 하는 밤이니, 다니는 기생집도 있고 한 터에 그냥 돌아오지는 않았겠지만, 어찌어찌하다가 서로 엇갈리고 헛갈리고 해서 할 수 없이 혼자 동떨어진 셈이었었다. 그는 술을 먹고 늦게 돌아왔다가 탑삭부리 한참봉한테 띄면 으레 붙잡혀 앉아서 술을 먹지 말라는 둥, 사내가 어찌 몇 잔 술이야 안 먹을꼬마는 노상 두고 과음을 하면 해로운 법이라는 둥, 이런 제법 집안 어른 노릇을 하자고 드는 잔소리를 듣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가시어, 살며시 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었다. 태수는 그래서 사푼사푼 마당을 가로질러 뜰아랫방으로 가노라니까 공교히 안방에서, “고서방이우” 하고 ..

<R/B> 탁류 (16) -채만식-

행화는 돈에는 주의도 하지 않고 입술에다가 루즈칠만 한다. “빨리 빨리!” “서두는 게 오늘 밤에 또 울어 뒀다, 고주사.” “미쳤나! 내가 울긴 왜 울어” “말두 마이소. 대체 그 초봉이락 하능 기 뉘꼬…… 예? 장주사는 알지요” “알기는 아는데 나두 상판대기는 아직 못 봤네.” 행화는 제중당에 있는 그 여자가 초봉인 줄은 모른다. 모르고 어느 기생으로만 알고 있다. “오늘 좀 불러 봤으면 좋겠다!…… 대체 어느 기생이길래 고주사가 그리 미망이 져서 울고불고 그 야단을 하노” “허허허허.” 형보는 행화가 초봉이를 이름이 그럴듯하니까 기생인 줄만 알고 그러는 것이 우습대서 껄껄거리고 웃는다. 태수도 쓰디쓰게 웃고 섰다. “예? 고주사…… 난두 기생이니 오입쟁이로 내 혼자만 차지하자꼬마는, 그러니 강짜를 ..

<R/B> 탁류 (15) -채만식-

첫째, 그는 제가 제 손수 무슨 농간을 부리든지, 혹은 누구를 등골을 쳐서든지, 좌우간 군산을 떠나 북쪽으로 국경을 벗어날 그 시간 동안만 무사할 돈이면, 돈 만 원이고 이삼만 원이고 상말로 왕후가 망건 사러 가는 돈이라도 덮어놓고 들고 뛸 작정이다. 뛰어서는, 북경으로 가서 당대 세월 좋은 금제품 밀수(禁制品密輸)를 해먹든지, 훨씬 더 내려앉아 상해로 가서 계집장사나, 술장사나, 또 두 가지를 겸쳐 해먹든지 하자는 것이다. 그는 재작년 겨울, 이 군산으로 옮기기 전에 한 반년 동안이나 상해로 북경으로 돌아다닌 일이 있었고, 이 ‘영업목록’은 그때에 얻은 ‘현지지식(現地知識)’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돈 만 원이나 올가미를 씌울까, 육장 궁리가 그 궁리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처럼 형무소가 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