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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14) -채만식-

그랬길래 그가 이 군산지점으로 내려와서 기를 탁 펴고 지내게 되자, 지금까지는 금해졌던 흥미의 대상인 유흥과 계집이 상해(上海)와 같이 개방되어 있는 그 속으로 맨먼저 끌려 들어간 것이다. 그는 마치 아이들이 못 보던 사탕을 손에 닿는 대로 쥐어 먹듯이 방탕의 행락을 거듬거듬 집어먹었다. 믿는 외아들 태수가 이 지경이 된 줄 모르고, 그의 모친은 그가 인제는 어서 바삐 장가나 들어 살림이나 시작하면 그를 따라와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려니, 지금도 매일같이 그것만 기다리고 있지, 천석거리 과부란 당치도 않은 소리다. 태수는 지난 사월에 그처럼 사세가 절박해 오자 두루 생각한 끝에 마루나의 육백 원 소절수를 또 만들어 그 돈으로 미두를 해본 것이다. 전에도 가끔 오백 석이고 삼백 석이고 미두를..

<R/B> 탁류 (13) -채만식-

갸쿠다마리의 얼굴들은 대번 금을 그은 듯이 두 갈래로 갈려 버린다. 판 사람들은 턱을 내밀고서 만족하고 산 사람들은 턱을 오므리고서 시치름하고, 이것은 천하에도 두 가지밖에는 더 없는 노름꾼의 표정이다. 이처럼 시세가 내리쏟기자 태수의 친구요 중매점 마루강(丸江)의 바다지인 곱사 형보는 팽팽한 이맛살을 자주 찌푸리면서 손에 쥔 금절표를 활활 넘겨본다. 사각 안에다가 영서로 K자를 넣은 것이 태수의 마크다. 육십 원 증금(證金)으로 육백 원에 천 석을 산 것인데, 인제 앞으로 십 정만 더 떨어져서 이십구 원 팔십팔 전까지만 가면 증금으로 들여논 육백 원은 수수료까지 쳐서 한 푼 남지 않고 ‘아시(證金不足)’이다. 형보는 잠깐 망설이다가 곱사등을 내두르고 아기작아기작 전화통 앞으로 가더니 옆엣사람들의 눈치를..

<R/B> 탁류 (12) -채만식-

영감님은 그 돈 만 원을 송두리째 어느 중매점에다 맡겨 놓고, 미두 공부를 기역 니은(미두학 ABC)부터 배워 가면서 일변 미두를 했다. 손바닥이 엎어졌다 젖혀졌다 하고, 방안지의 계선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동안에 돈 만 원은 어느 귀신이 잡아간 줄도 모르게 다 죽어 버렸다. 영감님은 여관의 밥값은 밀렸고,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은 몰라도) 찻삯이 없었다. 중매점에서 보기에 딱했던지, 여비나 하라고 돈 삼십 원을 주었다. 영감님은 그 돈 삼십 원을 받아 쥐었다. 받아 쥐고는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후유- 한숨을 쉬더니 한숨 끝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죽었다. 이것이 군산 미두장을 피로써 적신 ‘귀중한’ 재료다. 그랬지, 아무리 돈을 잃어 바가지를 차게 되었어도 겨우 선창께로 어슬렁어슬렁 걸..

<R/B> 탁류 (11) -채만식-

“저녁? 응, 해서 지금들 먹는 참이구. 그래서 본인두 어서 들어가서 진지를 자셔야지, 생리학적 기본요구가 대단히 절박해!” “저어, 이거 갖다가…… 응” 우물우물하더니 지전 한 장, 오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슬며시 밀어 놓는다. “……어머니나 아버지 디려요. 아침 나절에 좀 변통해 볼려구 했지만 늦었습니다구.” 계봉이는 승재가 오늘도 아침에 밥을 못 하는 눈치를 알고 가서, 더구나 방세가 밀리기는커녕 이달 오월 치까지 지나간 사월달에 들여왔는데, 또 이렇게 돈을 내놓는 것인 줄 잘 알고 있다. 계봉이는 승재의 그렇듯 근경 있는 마음자리가 고맙고, 고마울 뿐 아니라 이상스럽게 기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얼굴이 꼿꼿하게 들려지지 않을 것같이 무색하기도 했다. “이게 어인 돈이고” 계봉이는 돈을..

<R/B> 탁류 (10) -채만식-

초봉이의 웃는 입은 스러질 듯이 미묘하게 아담스럽지만, 계봉이의 웃음은 훤하니 터져 나간 바다와 같이 개방적이요, 남성적이다. 그런만큼 보매도 믿음직하다. 계봉이는 아직 활짝 피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래잖아 초봉이의 남화(南畵)답게 곱기만 한 얼굴보다 훨씬 선이 굵고, 실팍한 여성미를 약속하고 있다. 이 집안의 사남매는 계봉이와 형주와 병주가 한 모습이요, 초봉이가 돌씨같이 혼자 딴판이다. 그러나 그 두 모습이 다 같이 정주사나 유씨의 모습은 아니다. 초봉이는 부계(父系)의 조부를, 계봉이와 형주 병주는 모계(母系)로 외탁을 했다. 초봉이는 부뚜막에 꾸부리고 서서 국을 푸다가 계봉이를 돌려다보다가 웃으면서, “왜 또, 뚜- 했니” “나는 머 어디서 얻어다 길렀다나? 자꾸만 구박만 허구.” 계봉이가 잔뜩 ..

<R/B> 탁류 (9) -채만식-

정주사는 손가락으로 병주의 콧물을 훑어다가 닿는 대로 마룻전에 씻어 버린다. 병주는 아직 얼굴에 남아 있는 놈을 부친의 그 알량한 단벌 두루마기에다가 문대면서 냅다 주워섬긴다. “아버지 아버지, 내 양복허구, 내 모자허구, 내 구두허구, 내 자전거 허구, 또 내 빠나나허구…….” 이렇게 정신없이 한참 외다가 비로소 헛다방인 것을 알고서, “히잉, 안 사왔구만, 히잉 히잉…….” “오냐 오냐, 오늘은 돈이 안 생겨서 못 사왔으니 내일은 꼭 사다 주마. 자아 방으로 들어가자, 우리 병주가 착해.” 달래면서 병주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고, 건넌방에서는 숙제를 하는지 엎드려 있던 형주가 그제야 고개를 내밀다가 만당 아무것도 사가지고 들어오지 않은 아버지는 나서서 볼 필요도 없던 것이다. 방에서는 부인 유씨가 서..

<R/B> 탁류 (8) -채만식-

“그건 그렇구. 그래 그러니 초봉이두 날 따라서 서울루 같이 가요. 글쎄 조로케 이쁘구 좋게 생긴 아가씨가 이따우 군산바닥에 묻혔어야 바랄 게 있나…… 서울루 가야만 다아 좋은 신랑감두 생기구 허지, 흐흐흐…… 그리구 아버지가 혹시 반대하신다면 내 쫓아가서 우겨 재키지 않으리 만약 어머니 아버지가 서울 보내기 안심이 안 된다면, 머 내가 우리집에다 맡아 두잖으리? 그러니, 이따가 집에 가거들랑 어머니 아버지한테 위선 말씀을 해요. 그리구 가게 되면 이달 보름 안으루 가야 할 테니깐, 그리 알구, 응” “네에.” 초봉이는 승낙하는 요량으로 대답을 한다. 사실로 그는 어느 모로 따지고 보든지 제호를 따라 서울로 가게 되는 것이 기쁜 일이었었다. 제호는, 그렇다. 방금 한 말대로, 여러 해 두고 벼르던 기회를..

<R/B> 탁류 (7) -채만식-

“아냐 정말야. 초봉일랑 인제 시집가거든 애여 남편 그렇게 달달 볶지 말라구. 거, 아주 못써. 그놈의 여편네가 좀 그리지를 안했으면 내가 벌써 이십 년 전에 십만 원 하나는 모았을 거야, 응 그렇잖아” “아저씨두! 두 분이 결혼하신 지가 십 년 남짓하시다문서 그러세요…… 내, 온…….” “아하하하, 참 그렇던가? 내가 정신이 없군. 그건 그런데, 초봉이두 알지만, 에, 거 여편네 히스테리 아주 골머리가 흔들려! 그 어떻게 이혼을 해버리던지 해야지 못 견디겠어. 아무것두 안 되겠어!” “괜히 그러세요!” “아니, 자유 결혼이니까, 이혼두 자유야. 거 새끼두 못 낳구 히스테리만 부리는 여편네 무엇에 쓰노!” “그렇지만 아주머니가 보시기엔 아저씨한테 더 잘못이 많답니다.” “잘못? 응, 더러 있지. 오입한다..

<R/B> 탁류 (6) -채만식-

초봉이는 본 체도 않는다. 그는 윤희한테 마주 해대지 못하고서 병신스럽게 당하기만 하던 일이 새 채비로 분했다. 하기야 지지 않고 같이 들어서 다투는 날이면, 자연 주객이 갈리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는 날이면 다시 직업을 얻기도 만만치 않거니와, 얻어진대도, 지금같이 장래 보기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오늘이라도 이 집을 그만두면 매삭 이십 원이나마 벌이가 끊기니 집안이 그만큼 더 어려울 것이요, 하니 웬만하면 짐짓이라도 져주는 게 뒷일이 각다분하지 않을 형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타산이야 흥분되기 전 일이요, 일을 잡치고 난 뒤에 가서, ‘참았더라면 좋았을걸…….’ 할 후횟거리지, 당장은 꼿꼿한 배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부터라도 그만두면 그만이지…….’ 무럭무럭 치닫는 부아가 이..

<R/B> 탁류 (5) -채만식-

행화도 초봉이의 아담스러운 자태며, 말소리 그것이 바로 맘씨인 것같이 사근사근한 말소리에 마음이 끌려, 볼일을 보려 가게에 나오든지 또 가게 앞으로 지날 때라도 위정 들러서 시잠시 한담 같은 것을 하기를 즐겨 한다. “우유는 누가 먹길래 늘 이렇게 사가세요” 초봉이는 행화가 달라는 대로 가루우유를 한 통 요새 새로 온 놈으로 골라 주면서, 궁금하던 것이라 마침 생각이 난 길에 지날 말같이 물어 본다. “예? 누구 멕이는가고” 행화는 우유통을 받아 도로 초봉이한테 쳐들어 보이면서 장난꾼같이 웃는다. “……우리 아들 멕이제!…… 우리 아들, 하하하하.” “아들? 아들이 있어요” 초봉이는 기생이 아들이 있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으나, 되물어 놓고 생각하니, 기생이니까 되레 일찍이 아이를 둔 것이겠지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