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93

혼불 4권 (43)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이헌의에게 징의는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두사람 다 서른 몇 살로, 돌아보면 어제 같은 나이였다. 금의 사람으로, 자는 자단이요, 호를 황화노인이라 한 왕정균은, 생후 얼마 안되어 글을 보고는 열일곱 자를 스스로 알았고, 일곱 살에는 능히 시를 지었다는 소문이다. 그는 거동과 용모가 아름답고 훌륭한데다가 담소를 즐거워하였으며, 문을 지어 말하고 싶은 바를 잘 나타냈다 하는데, 산수, 고목, 죽석의 그림에, 당대에 따를 자 없이 빼어났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은 신품이었다. 타고난 재능에다, 송의 문호주를 종으로 삼아 밤낮으로 붓이 닳도록 대를 그리던 황화노인은"항상 등불 아래 대나무 가지를 비추어, 그 그림자를 모사하여 참모양을 그리었다."고 하였다. 천지는 거대한 ..

혼불 4권 (42)

그저 파적으로 대나 한 폭 치고, 배운 글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글씨를 쓰는 것이지, 아는 것도 없고 깨친 바도 없는데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밀고 들어와 화선지를 펼지는 사람이 생기고, 그가 선서자라 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지면서 문중에서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의 서화 한 점 얻기를 원하게 되었지만, 막상 그 자신은 족자 하나 반듯하게 걸어 놓을 자리도 없을 만큼 살림이 곤궁하였다. 강보에 싸인 유아를 면하지 못했을 때 불운하게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숙부의 손에 맡기어져 자라난 그가, 타고난 필재는 참으로 남 다른 데가 있었다. 문중의 사숙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 하늘 천 따지,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외우고 쓰는데, 처음에는 해서를 힘써 익히었고, 동몽선..

혼불 4권 (41)

19 동계와 남평  불용재위명봉관 불수절작조어간 천화백초조령후 유향분분설리간그 마디 잘라 내어 진기한 피리도 만들지 않고 모름지기 물가의 낚싯대도 만들지 않고 천 송이 꽃 백 가지 풀 다 시들어 사라진 뒤 푸른 댓잎 분분히 날리는 눈 속에 그대로 두고 보리매안의 이씨 문중에서 항렬과 연치가 가장 높고도 학덕이 있어 문장으로 받드는, 동계어른 이헌의의 큰사랑방 벽에는 몇 줄 화제가 쓰인 서화 한 폭이 걸려 있다. 설한 풍족이다. 이것은, 여러 해 전에 고희를 맞이한 이헌의에게 대여섯 살 수하인 재종 이징의가 축수 인사로 보낸 그림이었다."남평은 풍족이 일품이라. 이 사람의 대는 이상하게 박토에 뿌리를 박은 것같이 까칠하면서도 그 늙은 마디와 갈라진 노엽에 메마른 힘이 있다."하며 몹시 마음에 들어 한 이헌..

혼불 4권 (40)

"무릇 만물이 다 뿌리가 있으며 가지가 있다. 이 뿌리를 잘 돋우어야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법, 무심한 푸성귀나 나무 한 그루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야 더 이를 것이 있으랴. 무릇 조상은 뿌리요, 자손은 그 가지나 잎과 같은 것이니 조상을 잘 위해야 자손이 성하여 잘 되어갈 것이 아닌가. 효자 효부는 조상 받들기를 지극한 성심으로 하여 영원한 세월 동안 귀하게 되어서, 그 몸을 세상에 드러내고 이름이 빛난다. 진정으로 효도하는 것은, 생존한 부모에게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도 잘 받드는 것이 또한 성효이다."하여, 집을 지으려면 받드시 먼저 사당을 지어야 한다. 만일 가세가 몹시 가난하고 집터가 좁으면 단지 한 칸 사당을 지어도 되지만, 할 수만 있으면 삼간 이상으로 짓고, 사당 안에는 시..

혼불 4권 (39)

새벽같이 달려온 선역꾼들이 꽝꽝 얼어붙은 겨울 땅을, 곱은 손을 불어 가며 가까스로 파 놓은 구덩이. 구덩이의 윗부분은 넓게 파서 외광이라 하고 그 아래로 다시 관만 들어갈 자리를 맞추어 판 곳은 내광이라 한다. 굴토를 끝내고, 긴 무명 띠에 의지하여 그 조붓한 내광에 조심스럽게 방향을 맞추고 겨냥을 하여 관을 넣으니, 광중은 마치 끼이듯이 알맞아서, 그 안에 아늑하게 들어가 누운 관은 얼핏 순하고 평화로운 어머니에게 안긴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부인은 한세상의 고단한 짐을 다 지상에 벗어 두고 홀가분히 조그맣게 저곳으로 돌아가 그 몸을 조용히 누인 것 같았다. 내광벽과 관 사이의 빈 곳을 석회로 메워 관 높이까지 채우며 보토를 하고는, 이 내광이 하늘 입구를 동천개로 덮으니. 방문을 한 번 닫은 관은 ..

혼불 4권 (38)

"사람이 귀한 줄을 모르면, 강아지 달구새끼 한가지로 보아 죽은 다음 일을 하찮게 해 버리고 말지마는, 사람이 그와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그 절차를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는 법이지. 거적에 말아다 내버리나, 만인이 울면서 따라가나, 결국은 흙 속으로 돌아가 썩고 만다고 간단히 생각하면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겉만 보고 속을 안 보는 짓인즉. 겉모양인 물질은, 물질 그대로 생김새 그대로 끝나는 것 같아서 얼핏 보는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그것이 물질의 한계라. 허나,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지 않은가. 이 정신의 세계는 무형한 가운데 있어 놔서 보이지는 않지만, 물질이 끝난 다음에도 끝도 갓도 없는 끈을 달고 나가는 것 아닌가. 허나 정신, 정신 허지마는 이 정신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

혼불 4권 (37)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님. 이제 저는 어르신들 계신 곳으로 돌아갑니다. 이무것도 모르는 불민한 제가 감히 이 집안의 살림을 맡은 종부가 되어, 가문의 영예를 빛내는 대신 많은 누를 끼치고, 할 일을 다하지 못한 채 송구스러운 혼백이 되었사오니. 부디 이승에서의 허물을 나무라지 마옵시고, 이 부끄러운 후손을 너그러이 받아 주소서. 축관이 혼백 상자를 받들고 맨 앞에 서서 사당으로 가는데, 그 뒤로 명정이 따르고, 명정 뒤에 널을 공손히 들어 조심스럽게 모실 때, 상주 이기채와 오복의 유복친들은 모두가 슬피 울며 그 뒤를 따라갔었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밝아 무정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마당으로 들어와 널을 상여에 실을 제, 축관은 처연하게 고사를 올렸다. 영이기가 왕즉유택 ..

혼불 4권 (36)

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집사자 하나가 제반에 받쳐들고 온 밥그릇을 두 손으로 받들어 저 안쪽, 신주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 한가운데 조용히 놓는다. 그'메'와 '갱'옆에, 생시의 밥상에 그러하듯이 나란히 놓인 숟가락과 젓가락을 바라보는 순간, 이기채는 비애가 사무쳐 통곡하였다. 아아, 어머니.애처로우신 어머니. 육류에,어물에, 웃기 얹은 떡, 그리고 온갖 적이며 전, 저오가와 과일들을 둥실하게 모양내어 높이 괴어 올린 제물들이 모두 한낱 허세로 보일 만큼 그 숟가락과 젓가락은 남루하고, 정답고, 절실하게, 그리운 체온을 눈물겹게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끝내 이승을 다 놓고 가지는 못하는 청암부인의 정이, 이승에 남아 우는 애자 이기채의 정을 구체적으로 떠먹는 숟가락일터이니. 이 숟가락이 아니라면 무엇..

혼불 4권 (35)

"육계 제 일천에서는 남녀가 서로 만났을 때, 몸을 부딪쳐 합궁하여야만 소망이 풀리고, 제 이천에서는 그 지경은 극복하였으나 그래도 서로 포옹은 해야 하고, 제 삼천에서는 그저 손만 잡고 있어도 충분하며, 제 사천에서는 드디어 그 손조차 놓아 버리어 오직 미소만으로도 합일하여 향기가 가득한 곳이라."는, 그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토에까지 사바의 예토에서 오욕 칠정으로 뒤엉킨 육신을 무겁게 짊어지고 헤매는 인간의 그 무엇이 절실하게 가서 닿아, 도솔대선 미륵보살의 불력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월명사는 꽃을 뿌리며, 뿌리며, 노래를 불러, 그 멀고 높은 도솔천에 기원을 보내었다."오늘 용루에서 산화가를 부르며 한 송이 꽃을 저 푸른 구름 너머로 솟구쳐 보내노니, 꽃이여, 너는 부디 은근하고 ..

혼불 4권 (34)

18 평토제  흰 옷을 입은 집사자들이, 옻칠을 한 제기에 높이 괴어 올린 제수들을 조심스럽게 받쳐들고, 청암부인의 신주를 모신 영좌 앞의 제상에 공손히 진찬한다. 살감이 살아 생전에 받는 밥상과는 달리 다리가 휘엇하니 길고 상면이 높은 제상은 마치 허공에 소슬하게 걸린 선반 같았다. 그 검은 상에 나무 그릇의 둥근 굽 닿는 소리가 명부의 음향으로 울린다. 솜씨를 다하여 굄새를 뽐낸 음식과 과일들을 얼른 보아 무슨 잔칫날의 큰상이나 다를 바 없는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혼백을 위한 음식이라 그러한가, 그 위에는 적막한 기운이 감돈다."나 죽은 다음에는 동네 사람들을 후히 먹이라."고 했던 청암부인은"이제 나 죽고 나서 제사가 돌아오거든 모쪼록 음식을 걸게 하여 아끼지 말고, 술도 많이 빚고, 떡도 많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