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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24)

옹구네는 언젠가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그러고, 그 내우법잉가 화초댐잉가 허능 것, 그렁 것도 다 머이 있을 때 허는 이얘기제에. 울도 담도 없는 방 한 칸에 돼야지들맹이로 오글오글 삼서, 어따가 안채를 짓고 어따가 사랑채를 짓는당가, 거그다, 머? 누가 못 보게 내우벽을 쳐? 꾀 벗고 장도칼을 차는 꼴이제.""동냥치 박적에 수실을 달고?"옹구네가 두고 쓰는 말이어서, 옆에 있던 평순네가 앞질러 뒷말을 미리 받고는 속으로, 둘러다 붙이기는. 사람의 도리란 거이 머 가진 것 있다고 챙기고, 없다고 팽개치는 거이간디? 매급시. 지가 허고 댕기는 행실이 있응게 누가 머라고 허께미 미리 입막음 허니라고. 하이고오. 울도 없고 담도없응게 그렇게 허구한 날 넘의 떠꺼머리 방으로 밤마실 댕기는가? 하면서도 겉으로..

혼불 4권 (23)

16.변동천하  "긍게 사명당이 원효대사 제자라."사람의 몸이 나이 들면 그 외양이나 근력이 작년 다르고 올 다르다더니, 이번 겨울, 눈도 별로 내리지 않은 깡추위에 삐쩍 마르고 오그라들어 완연 늙은이 형용이 되어 버린 공배는, 주름골이 깊이 패인 양쪽 볼따구니가 훌쭉하게 들어가도록 곰방대를 빨며 말했다. 곰방대는 댓진이 뻑뻑하다. 결이 갈라진 그의 음성에도 댓진이 끼여 있다."그게 누구간디요?"묻는 것은 평순네다."잉? 그게? 시님이제. 이조 유명헌 시님 아니라고? 둘다. 참 몇 백 년 몇 천 년 만에 한번이나 나는 출중허신 냥반들인디.""이것 조께 잡사 뵈겨.""머이여. 이게?"말 중간에 공배네가 옆에서 막 깎은 무를 보기 좋게 토막 내어 공배 앞으로 밀어 놓는다. 대가리가 파릇하고 속이 시리게 흰 ..

혼불 4권 (22)

한번 날아간 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빈 둥우리가 재와 같이 삭아 버리는 나무의 가슴패기나, 한번 떠나간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그를 기다리던 집터는 무너지고 황폐한 마당에 우북한 쑥대만 바람에 씻기는 땅이 서럽다면. 사람의 마음도 나무나 땅일 수 있을진대, 그 마음이 서 있는 나무나, 기다리는 땅에, 새와 사람이 되는 이는 또 누구인가. 결국, 오지 않는 강모를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아흐레 만에 청암부인의 출상을 하던 날. 맨 위에 부운과 같이 높이 떠 있는 백포에 검은 단을 돌려 두른 앙장을 차일처럼 드리우고, 그 아래 진분홍 사엽받침 연꽃 봉오리를 정수리에 얹은 지붕 보개를 둥그렇게 덮은 상여는 참으로 화려해서 오히려 저승의 것이었다. 이승의 누구라서 그 한세상이 저토록 고운 색깔의 잔치 속..

혼불 4권 (21)

나무는 새들을 찾아 나설 수가 없다. 오직 저 혼자, 새를 부르며, 선 자리에 선채로 목 놓아 어둠이 깊어지는 수밖에는. 그렇게 나무가 어두워져야 새들은 돌아온다. 한번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뿌리가 썩어도 다리를 옮길 수 없는 나무와, 날개 가진 새의 안타까운 인연이라니. 그래서 옛 성현이신 공자도 "새는 나무를 골라서 살지만, 나무는 자기에게로 와서 사는 새를 선택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조즉택목 목기능택조"라고 하신 일이 있었던가. 따라갈 수 없는 공중으로 날아 다니는 새들이 진종일 비워 놓은 둥우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는지도 모르는 새가 까칠하게 비운 둥우리를 안고, 그저 새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는 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 나무가 "돌아오라."기다림이 목메인 둥우리로 새들을 부를 수 있는 목..

혼불 4권 (20)

15. 박모  날이 저문다. 그렇지 않아도 진종일 낮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하늘은, 구름이 가린 볕뉘마저 스러지는 저녁이 되면서, 그 젖은 갈피에 어스름을 머금어 스산하게 어두워지는데. 하늘은 마치 아득히 펼쳐진 전지의 회색 창호지 같았다. 아니면 담묵을 먹인 거대한 화선지라고나 할까. 검은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동짓달의 빈 천공에, 노적봉은 메마른 갈필로 끊어질 듯 허옇게 목메이며 스치어 간 비백의 능선을 굿고 있었다. 이 능선 너머 아슴한 곳으로 드리워진 한지의 하늘 끝자락은 수묵의 연지에 닿아 있어, 거기 저절로 스며든 어둠이 서서히 그림자 누이며 번져 온다. 소설, 대설이 지난 겨울 저녁, 흐린 하늘의 박모를 노적봉은 제 가슴 쪽으로 지그시 모아들인다. 그 어스름이 검불의 가루같이 내리며 모..

혼불 4권 (19)

그때 자광의 생모는 자광의 생가요, 상전의 집인 남원읍 누른대에서 동쪽으로 낙고개를 넘고 요천수를 건너는 이백면의 작은 마을 '폐문이'에 살고 있었다. 자광을 낳은 덕분으로 유규의 비첩이 된 그네는, 신분은 여전히 노비였으나 계집종이 하는 궂은 일만큼은 면하고, 이만큼 떨어진 폐문이에 조그만 오두막을 한 칸 얻어 따로 나와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외거노비인 셈이었다. 이러한 그네가 서른 중반의 나이에 자광을 남기고 세상을 뜨니, 남루한 집안에는 들여다보는 사람 그 누구도 없고, 오직 자광이 혼자서 비통을 가누지 못하여 서럽게 울 뿐이었다. 아버지 유규는 벼슬살이로 멀리 외지에 가 있기도 하였지만, 설혹 집에 있다 할지라도, 일개 노비의 초상에 지아비로서의 범절을 갖추고 찾아와 울어 줄 리는 천만 없었으..

혼불 4권 (18)

"내 죽은 후에 필연코 무덤을 파내어 부관참시를 할 것이니, 나의 시체를 전일에 죽은 하인의 무덤 근처에 묻되 누구도 모르게 평장을 하고, 만일 금부에서 내 무덤이 어디냐 묻거든 하인의 무덤을 가리키시오."극통한 중에 유자광의 말을 그대로 따른 지 몇 달 후. 아니나 다를까. 훈구파를 누르고 득세한 사림파가 자광의 시체를 찢고자 그 무덤을 찾으니, 사람들이 하인의 것을 가리킨지라. 그것은 누가 보아도 권세 재상의 묘소가 분명하였다. 이에 그들이 무덤을 파헤친 뒤 관 뚜껑을 뜯어 시체를 들여다본즉, 선연하게 붉은 생사로 얇게 짠 적초의에, 백초로 중단을 대어 입고, 운학 금환수를 늘이운데다가, 무릎에는 폐슬을 달고, 허리에는 무소 뿔로 깎은 서각띠를 두른 채, 흰 버선에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는 시체의 수..

혼불 4권 (17)

"자네, 귀신사 아능가?"임서방이 어서방한테 물었다. 멍석 위에 앉아 있던 어서방네는 움칠하는 시늉을 일부러 지어 보이며 어서방 대신 말을 받는다. "귀신사? 그게 머이다요예. 귀신 나온다 헐 때 그 귀신 말잉가?""그게 여러 가지 설이 있제. 맨 몬야 그 절을 세운 이는, 신라 문무왕때 사램인 의상대사란 고승이신디, 당초에 이름은 국신사였등게비데."그러던 것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괴하게도 귀신사로 바뀌어 불리다가, 다음에는 구순사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다시 귀신사라고 글자만 바꾸어 지금까지 그 이름을 쓰고 있다는 이 절 입구에는"홀에미다리라는 지댄헌 돌다리가 있제."임서방은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말했다.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이 다리는, 원평으로부터 한참을 걸어와 제비산 기슭에 이르러 귀신사로 ..

혼불 4권 (16)

14. 별똥별 "긍게 아들 둬야네, 아들. 아들이 효자가 많에. 만고에 심쳉이 같은 효녀도 없는 것은 아닌디.""머 엄동 시안에 객광시럽게 잉어 먹고 잪다, 죽순 먹고 잪다, 그러는 노부모 봉양헌 이얘기? 나 맨날 그른 이얘기 들으먼 웃음이 나오등만. 충신 날라먼 나라가 어지러야고, 효자가 날라먼 부모가 노망을 해야겄드랑게. 거 어디 맨정신 갖꼬야 북풍한설 때 아닌 눈 속으서 그렁거 잡어다 도라, 캐 오니라, 허겄다고? 망령이 나서 물색 없이 보채는 부모가 있어야 죽고 살고 해다 디리는 자식도 생기제. 심봉사만 해도 그거이 어디 보통 속없는 늙은이여?""그게 아니라, 한겨울 잉어 죽순도 쉽든 않지마는 그보담 더 알짜 효자는 따로 있제.""무신?""다리 놔 준 효자.""아, 순창 한다리?""하아. 원래 거..

혼불 4권 (15)

그러나 그는 타고난 기를 죽이지 않고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가,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로부터 시작하여, 세조의 특채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세조 14년 무자년에 문과 급제 장원을 하였다. 문과 급제후, 그의 벼슬은 자꾸 올라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성종 24년 팔월에는 예조판서, 대사헌을 지낸 명신 성현과 더불어 악학궤범을 편찬, 완성하였다. 이렇게 조정에 굳은 기반을 가진 기성 세력 훈구파의 한 사람이었던 무령군 유자광은 영남 출신인 사림파들과 항상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결국 연산군 4년에는 무오사화를 일으키어 사림파를 한 손으로 쓸어 무참하게 죽이니, 조야에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일신으로만 본다면, 이일로 감히 누가 그 뜻을 어기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큰 위세를 떨치게 되어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