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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5)

입 모양이나 말하는 품이 아마도 이런 따위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정말 강모가 오유끼한테 묻고 싶은 말들이었다. 설마 네가 나를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안면 있는 사람들끼리 우연히 같은 기차를 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오유끼는 오유끼대로 솜리(이리)나 어디쯤 갈 일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으니. 이제 곧 내릴는지도 모른다. 기차는 전라선 가냘픈 지류에서 호남선 물목으로 들어서려 한다. 그러나 그네는 이리에서 내리지 않았다. 내리기는커녕 단팥죽 장수가 손수레를 밀고 복잡한 차내의 승객과 봇짐 사이를 용케도 누비고 다니면서, 구슬픈 듯 독경하듯 단팥죽을 사라고 외자, 두 손을 까불어 그를 부르더니"머가 맛나요?"묻는 모양인지 생긋 웃기까지 하면서 장수와 몇 마디 나누고는 고개를 갸오록 빼밀고 손수레 ..

혼불 4권 (4)

11 무엇을 버리고  "무얼 그렇게 골똘히 생각허냐? 아까부터."아마 강태는 집짓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봉천에 도착할 때까지는 한번도 뜨지 않을 것처럼 날카롭고 무겁게 감은 눈을 실같이 열고 강모의 안색을 훑으며 강태가 묻는다. "아니요, 아무것도."어느결에 전주역을 벗어나 버린 기차가 덕진을스쳐 동산촌을 지나서 삼례 한내 다리 가까이 처꺼덕 처꺽 처꺼덕 처꺽, 철궤를 따라 달린다."착찹하겠지."강태의 목소리가 웬일로 눅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잠긴 그의 음성은 묵득 그가 형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데 아닙니까."강모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한다."제법인데? 도련님. 난 또 네가 젖 떨어진 아이모냥 혹시.""형님도 참. 내가 무슨 어린앤가요?""아니라니 다행이구..

혼불 4권 (3)

또다른 사내종 시능이는 무술생이며 계집종 만업이는 갑신생이다. 그런즉 이 숫자는 모두 여덟이다. 도합하여 열여덟 명 종들의 이름을 이기채는 낱낱이 세어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을 짐작해 보았다. 그들을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거기 또렷또렷 생생하게 적혀 있는 이름들이 꼭 살아 있는 눈구녁들 같아서 그는 전율을 느꼈었다."그래, 나는 이 한 많은 세상에 종이었다."이름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들은 어찌 종이 되었을까. 난신적자의 자녀 중에 아들은 목을 베고 딸은 관에 잡아들여 먼 변두리 고을 관아의 관비로 만들었으니, 이 관비가 낳은 소생들은 어쩔 수 없이 관노, 관비가 되지만, 그 핏속에는 세월을 잘못 만난 양반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또 양민..

혼불 4권 (2)

"어머니, 잠깐 다른 생각이온데, 그 고리배미 송림이 타고난 제 값을 못하는 것은, 그 주변 경관 탓도 있지 않을까요? 만일, 금 송곳으로 돌을 쪼고 학의 부리로 무래를 그은 것 같은 절묘한 풍관 속에 그 수풀이 앉았더라면, 그런 무지몽매한 대접을 받을 리 있겠습니까? 고리배미야 그저 민틋한 동산 아래 두리두리 멍석을 펴 놓은 것 같은 마을일진대, 송림 홀로 울연 창창하다 하나, 그런 범하지골의 풍경 속에서는 제격이 제대로 드러나기도 어렵고, 심지어는 개발의 편자처럼 제 격을 갖추었다 하기도 어렵겠습니다.""옳다. 내 그래서, 그 붉은 용의 무리 같은 육송들을 바라보면서 한탄했더니라. 어쩌다 저만한 귀골의 씨앗들이 이런 민촌으로 날아와 떨어졌을까. 그 풍향의 곡절은 알 리 없었으나, 자리를 잘못 앉은 것..

혼불 4권 (1)

10 귀.천  "그런 좋은 육송은 참 흔치 않을 것이다. 나도 보고는 놀랐더니라. 수령이 한 이백 년 가차와 보이던데, 물고기 비늘 같은 노송의 송린은 차라리 용의 비늘이라 하는 것이 옳더라. 그 둥치의 기상이 땅의 정기를 뽑아 올려 하늘로 토하는 용틀임 그대로인데 , 또 어떤 이는 화제에 적갑창발이라 쓰기도 했으니, 소나무가 붉은 비늘 갑옷을 입고 그 머리를 검푸르게 두른 모양을 말한 것 아니냐. 예전에 이영구라고도 하고, 이성이라고도 하는 사람은 뛰어난 소나무를 많이 그려 이름이 높았더란다. 항상 용반봉저로, 마치 용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몸을 서린 것같이 몸통을 그리고, 봉황이 날개를 솟구쳐 하늘로 날으려는 것처럼 송엽 상서로운 머리를 그렸다 하더라. 본디 송이란, 유덕 심정한 단인정사의 품격으로,..

혼불 3권 (完, 54)

그것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소작인은 소작지를 애호하고, 조금이라도 지력 소모를 가져올 것 같은 것을 경작하지 않음은 물론, 모두 귀사의 지도에 따라 전심으로 농사 개량에 정려하고 이를 열성, 충실히 실행하겠다고 하는, 말 같잖은 말 같은 것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숨이 다 막혔다. 하늘 아래, 내 땅이야 있건 없건, 농사꾼이 농사를 지으면서 누가 제 자식 같고 어버이 같은 땅을 아끼지 않겠으며, 또 어느 누가 열심을 다하지 않겠는가. 말하지 않고도 너무나 당연한 것까지 위압적으로 적어 놓은 그런 항목들은, 순리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농사라는 차꼬를 차고 앉아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 버린 징역살이 같은 생각이 들게하여, 소작인의 며가지를 조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이 좋아 '지도'지 ..

혼불 3권 (53)

서운이 할미 얼굴에 이윽고 미심쩍으나마 안도의 빛이 번지는데, 곁에서, 나이 그 중 많은 부칠이가 머뭇머뭇 무슨 말을 얼른 꺼내지 못해 움찔거린다. "그런디 말여, 자네는 그렇게 확실히 월백 같고 설백 같지만, 동네에는 또 동네법이 있잉게로. 풍행이 난잡헌 것 아니란 징명을 헐라먼, 저 그 동엄에 어른한테로 조께 같이 가야겄는디, 어쩌까잉. 거그가서 자네가 직접 발명을 해 보소. 시방 자네 오기를 지달르고 지실 거잉만." 그러자 비오리가 하얀 이를 싸악 드러내고 웃었다. 갑작스러운 그 웃음에 등골이 쭈뼛해지며 놀란 것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동엄 어른네 마당으로 가능 것은 에럽잖으나, 징명은 에럽겄소잉? 버얼건 대낮에 사람들 다 둘러선 마당에서 멍석을 깔어 놓고 머엇을 어뜨케 징명을 허까요? 암만 해도 ..

혼불 3권 (52)

나무장수 부칠이가 하릴없이 맞장구를 치고 말자 나막신 깎아 파는 모갑이는 이야기하는 사람 앞으로 무릎을 당겨 앉으며 물었다. "그런디 왜 더 못 살고 기양 와?" "왜는 왜여? 진의원 마느래 땜이 그렇제." "마느래?" "옳제, 투기를 했등게비구나?" "투기라도 기양 머 첩의 년 머리 끄뎅이나 조께 잡우댕기고, 세간살이 뿌수거 시끄럽게 해 놓는 정도가 아니라, 아조 제대로 했능갑서." "어뜨케?" "진의원이 왕진가는 날을 지달르고 있다가잉, 그 마느래 수족 같은 예편네 몇 이서 작당을 해 갖꼬는, 불문곡직 달라들어 질질질 끄집어다 비오리 꾀를 활씬 벳겨서, 터럭이라고는 다 쥐어뜯고 뽑아내 민둥이를 맹길었다대." "어, 독헌 년들." 부칠이와 모갑이는 머리를 털었다. "거그서 끄쳤드라먼 그래도 낫었을 것을..

혼불 3권 (51)

"어디 가서 바. 없는 디." "큰아부지라도, 작은아부지라도, 누구 아부지 핏줄이고 탁인 사람 한 번만 봤 으먼. 그런 사람 만나먼, 이어어케 손 한번 대 보먼 아부지 살 같을 것맹이여." "살." "잉." 막걸리를 마시던 술청의 도부장수는 어느결에 일어나 가 버리고, 저무는 주막 의 됫박만한 방에 비스듬히 마주앉은 두 모녀는, 말이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이고 만 있었다. "양반, 상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못 배워 모르면 그것이 상놈인 것이다. 근본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라도 이 세상에 났으면 낳아 준 부모가 있고 또 그 부모의 부모가 있지 않으냐. 헌데 그 가닥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가닥을 놓쳐 버리면 그것이 곧 상놈이니라. 곧 선조의 유래를 모르고, 제 아버지, 어머 니가 누구인지, 할..

혼불 3권 (50)

이 솔밭은 고리배미의 장관이요, 명물이었다. 마을을 둘러보아 눈에 띄는 명승이나 정취로이 바라볼 만한 무슨 풍경 하나도 없이, 그저 둥실한 고리봉 아래 평평한 마을이 해바라지게 한눈에 들어오는 것 이 고리배미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져 마을을 나직히 두르고 있는 동산이 점점 잦아내려 그저 밋밋한 언덕이 되다가 삼거리 모퉁이에 도달하는 맨 끝머리 에, 무성한 적송 한 무리가 검푸른 머리를 구름같이 자욱하게 반공중에 드리운 채, 붉은 몸을 아득히 벋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민촌에 아깝다." 고 이 앞을 지나던 선비 한 사람이 탄식을 하였다는 적송의 무리는, 실히 몇 백 년생은 됨직하였다. 이런 나무라면 단 한 그루만 서 있어도 그 위용과 솟구치는 기상에 귀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