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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41)

8. 거멍굴 근심바우 서산 노적봉을 등뒤에 병풍같이 둘러 세우고 멀리 아득한 동쪽으로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마을 매안의 지형은,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산 노적봉의 기 맥이 아래로 벋어 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면서 평평한 둔덕을 짓고 고이는데, 그 자락 끝에 나붓이 드러난 발등과 같이 도도록하다. 그냥 뒷동산이라고 불리는 산 자락 기슭에는 해묵은 밤나무가 들어차 우뚝하 거나 드러누운 바위의 큰 덩어리들과 어우러져 동무를 하고 있는데, 이 밤나무 숲을 뒤안으로 한 원뜸이 마을의 맨 위쪽이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암수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종가의 솟을대문 아래쪽으로는 형제, 지친과 그 붙이의 집들이 모여 있다. "송무백열,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더니만, 이것은 행..

혼불 3권 (40)

그만큼 조선은 성씨를 중심으로 엄격히 이루어진 사회였다. 세종실록에 보면 벌써 이때 우리나라의 성씨 수는 약 이백오십 개, 본관의 수 는 일천오백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양반 지배 체제가 존속하는 동안, 성과 본관을 감히 가지지 못한 천인들고 있었으나, 한말에 근대적인 호적 제도가 시행된 뒤부터는, 조선 사람이 면 누구라도 성과 함께 본관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씨와 본관의 우열에 대한 관념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본디 성씨와 더불어 본관 제도는 계급적은 우월성과 신분의 상징으로 대두되 었던 만큼, 그것에 입각한 신분 관념은 오랜 세월 음으로 양으로 층층이 뿌리를 내려, 좀체 쉽게 떨치거나 바꾸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므로 본관은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어떤 성원들의..

혼불 3권 (39)

학생들도 따라서 묵연히 고개를 떨어뜨리었지. "제군들이여, 그대들은 조상의 간절한 염원이 어리고 어려서 그 정혈로 생긴 사람들이다. 좋은 자식을 낳고 싶은 제군의 부모 양위께서 합심하여 정성으로 합일하시고, 그 부모 두 분을 낳으신, 그대 아버지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대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렇게 하셨다. 조부모와 외조부모님, 네 분의 염원 이 제군의 부와 모를 낳으시고, 그 부와 모께서는 또 제군을 낳으셨는데. 제군 하나의 몸에 벌써 숨소리 닿는 조상 여섯 분이 직접 작용하시거늘, 증조와 고조, 또 그보다 더 윗대조로 아득히 더듬어 올라가자면 그 수를 다 어이 헤아리리. 이 모든 조상의 지극한 염원으로 자식들을 태어났고, 이제 드디어 제군이 세상 에 났다. 자, 제군들이여, 지금 이 순간, 자..

혼불 3권 (38)

순간, 자신이 타고 있는 이 기차가 운명의 검은 피리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너는 나를 입김으로 불어 내어 그 어떤 노래를 부르려느냐. 비가. 어쩌면 나는 지금 여지껏 살아오던 모든 것과 함께, 이 기차의 울음속에 증기 로 기화되어 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형체도, 시간도, 관계도. 어린 시절 매안의 아랫몰 복사꽃 핀 냇물과 버들가지 꺾어서 불던 피리, 푸른 풋내 서투른 입김 속에 섞여 번지면 까닭도 알 수 없는 풀물이 가슴에 들어, 하 루 종일 필릴릴리 판막이 떨리곤 하였는데, 버들피리 연두 물빛 아득히 흔들리 는 아지랑이 너머로, 아아, 봄의 비늘처럼 하염없이 날리고 날리던 연분홍 살구 꽃, 꽃잎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러던 날, 어느 해 봄, 전주..

혼불 3권 (37)

7. 부디 그 땅으로 기차 천장에서 비추이는 불빛이 메마른 주홍으로 가루처럼 부옇게 내려앉은 강모의 얼굴은, 움푹 패인 눈그늘과 창백한 콧날 음영 때문에 핏기가 없고 푸석 푸석한 마분지 가면 같아 보인다. "빗자루냐? 좀 풀고 편안하게 앉어라. 갈 길이 멀어." 강태는 부스럭거리며, 선반 위에 올려 놓은 가방과 짐보따리를 매만져 반듯하 게 들이밀기도 하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어 앞뒤로 주소 확인 도 하더니, 의자에 털썩 앉으며 어깨를 좌악 펴 등받이에다 부리고 기댄다. 그리고는 강모한테 농담을 던지듯이 한 마디 하고,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 면서, 마치 이제부터 출발하면 봉천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을 사람처럼. 꾹. 날카롭게 감은 눈이 뜨고 있을 때보다 단호하고 예리..

혼불 3권 (36)

춘초는 연녀록인디 왕손은 귀불귀네 그려 어와 세상사가 허망하다 젊어 청춘 소년들아 백발 보고서 웃지 마라 우리 같은 젊은 사람도 늙을 때가 있드란다 비단같이 곱던 얼굴 고목으로 변해 간다네 어어이노오 어어허와너 어너리 너어화 어어화너어 나는 가네 나는 가네 구사당에 하적하고 영결 종천에 나는 가네 먹더언 밥을 개 덮어 놓고오 들던 수저가 상녹이 나겄네 그려 날 간다고 설워 마라 죽어서 가는 나도 있다 공수래 공수거 허니 초로 인생이로고나 그려 무정하더 무정허요 못 가시리요 못 가시리요 산 첩첩 적막한 곳에 혼자 누워 계시게 되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행하실까 나는 가네 나는 가네 명정 공포 운아삽이 어서 가자고 재촉을 하니 동네 어르신 우리 일가 친척이든지 우리 자녀들 남은 친구들..

혼불 3권 (35)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유택으로 떠나는 망인의 마지막 모습을 배 웅하려는 사람들이 상여 뒤쪽에 에워 서 있는데, 굴건 제복의 이기채는 오동나 무 상장을 짚은 채 창자를 훑어 내는 아픔으로 곡을 한다. 효건을 쓴 위에 굴건을 쓰고, 거친 삼베로 재최복을 입은 그는, 삼대를 발라 낸 피삼을 왼새끼로 동아줄같이 꼰 삼노로 수질을 만들어 머리에 두르고 요질을 만들어 허리에 두른 채, 다리에는 삼베 행전을 치고, 흰 무명을 신총에 감은 짚 신을 꺼칠하게 신고 있다. 앞으로 쏟아지는 그의 몸을 받치는 것은 오직 한 자루 오동나무 지팡이 삭장 이다. 옷깃이 없고 소매가 넓은 저고리 대수장군의 긴 허리 아래로, 좌우에 달린 세 폭의 삼베 자락이 뒤에 드리운 여섯 폭 자락을 데불고 슬픔을 달래는데, 등을 덮..

혼불 3권 (34)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는 모든 관계의 사람들이 오복의 경우를 헤아려 슬픔 을 표하고 복을 입지만, 요사한 사람을 위해서는 순서에서 한 등급을 낮추어 입 고, 시집을 갔어도 남편이나 자식이 없으면 부장기를 입으며, 서자는 자기를 낳 은 어머니를 위해서도 삼년복을 입니 못한다. 또 첩도 남편의 장자나 뭇 아들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하여 애통히 여기고 복을 입는다. 부모상에 대나무와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는 것은, 그 나무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물론이고, 오동나무도 다 자라면 속이 메워지지만, 지팡이를 만들 만큼 어려서 아직 크기 전에는 비어 있다. 혹 누구는 그것이,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너무나 노심 초사하여 속이 다 녹아 없어진 것을 슬퍼하며 기리어 짚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

혼불 3권 (33)

너는 모를 것이다마는, 나는 그때, 많이 울었느리라. 처음에 너를 가져, 부끄럽 고 고마운 중에 아들 낳기만을 간절히 축수하였더니, 천지 신명이 무심하지 않 고 조상의 음덕이 내게 끼쳐서, 손 귀한 집안에 해 같고 달 같은 너를 낳았는데. 젖도 떼기 전에 큰집으로 너를 보내 놓고, 아무도 모르게 돌아앉아 눈물 짓곤 하다가, 아니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마음을 다잡아 먹곤 했었더니라. 비록 너를 떼어 보냈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나이 젊고, 너의 아버지 옆에 계시니, 큰 집의 형님처럼 고단한 데 비기랴.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 이 다음에도 부디 아들 낳아지이다. 하늘이 감응하사 아들 낳아지이다. 전생이 있다 하면, 내가 아마 전생에서는 형님의 아들을 양자 로 데려왔었던가 보다, 이렇게 전생의 빚을 ..

혼불 3권 (32)

. 다음에는 왼쪽에 한 수저를 넣었다. "천 석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운데 한 수저를 넣었다. "만 석이요." 아아, 어머니. 죽음이 무엇이요. 고꾸라지는 이기채를 가까스로 만류하고, 홈실댁은 망인의 얼굴에 덮을 멱모 를 두 손에 든다. 네 귀퉁이에 끈이 달린, 짙은 검은색 공단 멱모의 안쪽에는 소름이 돋게 붉은 명주가 받쳐져 있다. 묵연히 청암부인의 시안을 바라보던 홈싷댁은, 혀를 차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망인의 얼굴 위에 멱모를 덮고, 족두리 쓴 흰 머리의 뒤로 손을 돌려 끈을 묶는 다. 여태까지 휘황하던 오색의 찬란함이 일순에 무참하게 적막해지면서, 죽은 얼 굴을 가린 검은 헝겊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그 검은 빛은 캄캄하게 당당하 여 온갖 현요한 색깔들을 일식에 제압하고, 이승과 저승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