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천령이 훌륭한 창의를 벗고 꾀죄죄한 두루마기를 입고 통량갓과 탕건과 망건을 벗고 탈망한 헌 제량갓만 쓰니 의복이 날개란 말이 빈말이 아니어서 청수한 얼굴까지 갑자기 틀려 보이었다. 단천령이 구지레하게 차리고 하인도 안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데 주인은 속으로 ‘저 양반이 어디 가서 암행어사질을 할라나.’ 하고 생각하였다. 단천령이 하처에서 나설 때 햇발 이 다 빠지지 않았었는데, 동문안 초향이의 집을 물어서 찾아오는 동안에 벌써 땅거미 다 되어서 저녁 연기 잠긴 속에 달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싸리문 밖에서 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안방에는 불이 켜 있으나, 불 있는 안방과 불 없는 건넌 방이 다같이 조용하여 마치 사람 없는 집과 같았다. 주인을 서너 번이나 연거푸 부른 뒤에 ”순아, 밖에 누가 오셨나 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