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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9권 (5)

단천령이 훌륭한 창의를 벗고 꾀죄죄한 두루마기를 입고 통량갓과 탕건과 망건을 벗고 탈망한 헌 제량갓만 쓰니 의복이 날개란 말이 빈말이 아니어서 청수한 얼굴까지 갑자기 틀려 보이었다. 단천령이 구지레하게 차리고 하인도 안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데 주인은 속으로 ‘저 양반이 어디 가서 암행어사질을 할라나.’ 하고 생각하였다. 단천령이 하처에서 나설 때 햇발 이 다 빠지지 않았었는데, 동문안 초향이의 집을 물어서 찾아오는 동안에 벌써 땅거미 다 되어서 저녁 연기 잠긴 속에 달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싸리문 밖에서 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안방에는 불이 켜 있으나, 불 있는 안방과 불 없는 건넌 방이 다같이 조용하여 마치 사람 없는 집과 같았다. 주인을 서너 번이나 연거푸 부른 뒤에 ”순아, 밖에 누가 오셨나 부다. ..

임꺽정 9권 (4)

“임자네를 우리가 상빈 대접하려구 뫼셔 온 줄 알았습나? 선비 양반, 미안하지만 우리 눈에는 사람 같지 않구 초개같으니 칼루 치구 앗으루 도리는 걸 알맞은 대접으루 알구 더 바라지 마소. ” 서림이는 농조로 말하는데, 신진사는 정색하고 아래와 같은 긴말을 훈계하는 어투로 말하였다. “옛말에 양 상에 군자가 있고 녹림에 호걸이 있다 하니 그대네 중에 군자도 있을 것이요, 호걸도 있을 것인데 그대네가 어찌하여 대당 소리들만 듣고 의적 노릇들은 하지 않는가. 의적이 되려면 의로운 자를 도웁기 위하여 불의한 자를 박해하고 약한 자를 붙들기 위하여 강한 자를 압제하고 또 부자에게서 탈취하면 반드시 빈자를 구제하여야 할 것인데 그대네의 소위는 빈부와 강약과 의.불의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박해하고 압제하고 탈취하되..

임꺽정 9권 (3)

한온이와 서림이가 탑고개에 나와 앉아서 도부장수들 오기를 기다리다가 하도 오래 오지 아니하여 졸개 하나를 금교까지 보내 보았더니 금교서는 떠났고 탑고 개에는 오지 아니한 것이 분명 용고개길로 돌아나간 모양이였다. 금교역말 갔다 오는 편에 약주와 돼지고기를 사와서 고기 안주하여 술이나 먹으며 비 그치기를 기다리자고 서림이가 한온이와 공론한 뒤, 두목과 졸개들을 동네 사람의 집에 가서 쉬라고 흩어보내고 단둘이 주막방에 앉았을 때 평산. 봉산 선비들이 주막 에 와서 술을 찾았었다. 상제는 한온이요, 탕창은 서림인데 서림이는 외가 성이 엄가인 까닭으로 본성명을 감출 때 흔히 엄가로 변하였었다. 서림이가 선비들을 방안에 들일 때는 심심파적이나 할 생각이요 해칠 뜻이 아니었는데, 주육을 권 하다가 얼얼지육 소리를 ..

임꺽정 9권 (2)

오정문 큰 길을 좇아서 오다가 오정문까지 나가지 않고 옥장다리께서 파지동 앞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잡아들 때, 바람에 나부끼는 가는비가 물을 뿜듯 사람의 얼굴에 끼치었다. 가는비에도 옷이 젖으니 유삼이 있으면 들렀을 것이지만, 유삼들은 안 가지고 우비라고 가진 것은 갓모들뿐이라 갓에 받 쳐 쓰고 오는 중에 가는비가 그치는 듯 굵은비가 시작하여 한 줄기를 제법 하였 다. 옷들이 함씬 젖었다. 미륵당이까지 오는 동안에 젖은 옷들이 몸에서 말라서 뿌득뿌득하여졌으나 아주 말려들 입느라고 미륵당이에서 한동안 늘어지게 쉬고 청석골로 나오는데, 골 어귀 동네 못 미쳐서 비가 또 시작하여 정생원은 웃옷자 락을 걷어들고 뛰었다. 동행 친구들보다 먼저 동네 와서 길가 집 처마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 집 방안에서 “치명이.” ..

임꺽정 9권 (1)

임꺽정 9권 4. 피리 이 해는 팔도가 거진 다 흉년이 들어서 삼남의 벼농사도 말이 아니고 양서의 조농사도 마련이 없었다. 삼남에는 오월 한 달을 내처 가물어서 고래실 땅에도 호밋모를 낸 데가 많았고, 엇답, 건답들은 거지반 메밀 대파를 하였었다. 가을에 와서 지주와 작인 사이에 도조 재감으로 말썽이 많이 생겨서 된내기 온 뒤까지 벼를 세워놓고 베지 않은 땅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삼남은 곡향이라 수한병식 하는 좋은 땅도 많거니와 밭곡식이 잘되어서 양서같이 참혹하진 아니하였다. 양 서는 첫가뭄이 들고 늦물이 가고 게다가 풍재에 박재까지 겸친 데가 있어서 두 태도 많이 줄었지만, 주장세우는 서속이 소출이 가량없이 줄었었다. 밤에 바심하 는 머슴들이 밤참 투정할 경도 없었고 북섬이를 숨치는 여편네들이 웃고 ..

임꺽정 8권 (37, 完)

이봉학이와 배돌석이는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를 데리고 앞을 서고 서림이는 백 손이와 함께 중간에 서고 꺽정이는 뒤에 서서 광복가는 길로 나오는데, 칼이며 창이며 활을 가진 장교와 사령과 군노들이 한 떼는 앞길을 가로막고 또 한 떼는 뒤에서 쫓아왔다. 관속 편에는 횃불이 있어서 활로 쏘고 돌로 치는데 겨냥대기 가 좋았다. 이봉학이의 활과 배돌석이의 팔매로 앞에서 쌈이 벌어졌다. 화살은 빨랫줄같이 건너가고 팔매돌은 별똥같이 홀러갔다. 관속 대여섯이 삽시간에 고 꾸라졌다. 횃불 있는 것이 불리한 줄 깨닫고 꺼버리는 듯 여러 자루 홰가 일시 에 다 꺼졌다. 저편에서 들어오진 못하나 이편에서 나가서 이편 저편의 동안이 가까워지며 웅긋쭝긋 섰는 것이 별빛 아래 보이었다. "살 받아라! " "돌 받아라! " 웅긋중긋이 ..

임꺽정 8권 (36)

꺽정이가 이봉학이더러 서림이와 의논하여 뒤처리를 하라고 맡기어 이봉학이 가 서림이를 불러가지고 둘이 서로 공론하였다.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좋겠소? " "혜음령 사람을 오늘 밤에 다 도루 보냅시다." "나두 그 생각인데 죽은 사람은 거적에 싸서 지워 보낼 셈 잡구 저 사람은 어떻게 보내야 좋소? " "업혀 보내지 요." "내일 하루쯤 조리를 시켜 보내는 게 좋지 않겠소? “ "또 미친 사람같이 날뛰면 피차간 좋지 못하니까 오늘 밤에 보내는 게 상책입니다." "한번 나가자빠 진다구 고만 까물키니 그런 얼뜬 사람이 어디 있소? ” "뇌후가 깨졌습디다." " 몹시 깨졌습디까? “ "자세히 보든 않았어두 몹시 깨진 것 같습디다." "묵솜을 얻어다가 지져나 주구려." "보낼 때 지져주어 보내지요." "죽은 사람..

임꺽정 8권 (35)

“어떻게 할 텐가?” 길막봉이 다그쳐 묻는 말에 정상갑이는 “글쎄요.” 하고 대답한 뒤 “자네 어떡허면 좋겠나?” 하고 최판돌이를 돌아보았다. “우리 사 람을 청석골 대장이 쓰실 데 있다구 오라시는데 안 갈 수 있나.” “불르러 오 신 길두령 낯을 뵙더래두 안 간달 수는 없지만 변변치 못한 놈들을 몰아가지구 가서 일을 잘못해서 낭패를 시켜 드리면 우리가 되려 미안스럽지 않은가.” “ 일은 잘못하더래두 몫이나 많이 노놔 줍시사구 말씀하세그려.” “그런 뻔뻔스 러운 소리는 자네나 하게. 좌우간 가긴 가야 할 테니 내일 아침밥들 일찍 먹구 이리 모이라구 밤에 돌아다니며 일러두세.” 정상갑이는 길막봉이 대접한다고 가지 않고 최판돌이만 혼자 돌아다니며 일러서 이튿날 아침에 바눌티로 모아들 인 사람이 겨우 한 삼십..

임꺽정 8권 (34)

그러나 사랑하는 첩 계향이와 같이 앉아서 어린 아들의 재롱을 볼 때는 한숨이 부지중 절로 나왔다. 황천왕동이가 떠나간 지 사흘 만에 되돌아와서 보고 들은 청석골 대소사를 꺽정이에게 이야기하는데, 가던 전날 노밤이 까닭으로 한바탕 난리 꾸민 이야기 를 들은 대로 다 옮기고 나서 “노밤이는 형님께서 오셔서 조처하실 때까지 함 부루 나다니지 못하두룩 감금해 두라구 이르구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잘했다.” 하고 꺽정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황천왕동이 돌아오던 이튿날 꺽정이가 이봉학이와 같이 장수원 길을 떠나는데, 황천왕동이 는 안식구들을 보호하고 있으라고 광복산에 머물러 두고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는 무기와 길양식을 지워 가지고 데리고 떠났다. 광복산서 장수원까지 삼백이십여 리 길에 첫날 백 리, 이틀에 ..

임껑정 8권 (33)

길막봉이가 곽오주더러 오는 놈들이 바짝 가까이 오도록 숨어 있다가 별안간 내닫자고 말하여 바위 뒤와 덤불 속에 은신들까지 하였으나 포교 복색 같은 것이 눈에 보이게 되자마자, 곽오주가 쇠도리깨를 높이 치켜들고 뛰어나가며 “너놈들이 웬놈들이냐!” 하고 소리를 벼락같이 질렀다. 더 가까이 오도록 기다려도 좋을 것을 곽오주가 지레 뛰어나가니 길 막봉이도 마저 큰소리를 지르며 쫓아나가고 졸개들도 아우성을 치며 쫓아나갔 다. 여러 놈들은 다 도망가고 오라진 놈 하나가 남아 있다가 쇠도리깨를 들고 달려드는 곽오주를 보고 “곽두령 아니시우?” 하고 알은 체하였다. “네가 누 구냐? 나는 너를 모르겠다.” “내가 노밤이오.” “노밤이? 성명은 귀에 익다. ” “서울 있는 노밤이를 모르시겠소?” “옳지, 네가 영평 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