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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31)

세월이 오래 흘러 근 오십오 년이나 다 되었어도 여전히 그 빛이 선연하여 조 금도 바래지 않은 비단 원삼은, 초록의 몸 바탕에 너울같이 넓은 색동 소매를 달고 있었다. 진홍, 궁청, 노랑, 연지에 연두, 다홍을 물리고, 부리에는 눈같이 흰 한삼이 드리워진 색동 소매는, 초례청에 선 신부가 입던 그대로여서, 죽은 이의 푸른 몸에 수의로 입히기에는 섬뜩하고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청암부인이 혼인하던 날 입었던 원삼이었다. 아무리 혼인을 앞둔 딸이 집안에 있다 하더라도 쉽게 마련하기 어려운 옷이 비단 원삼이고, 또 한 번 입은 다음에는 다시 입을 일이 없는 것이 원삼인지라, 웬만한 사람들은 문중이나 집안간, 혹은 마을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공동으로 돌려가며 입는 것이 보통인데, 청암부인의 친정 가세가 ..

혼불 3권 (30)

6 가도 가도 내 못 가는 길 "내 이제 죽어 육탈이 되거든 합장하여 달라." 청암부인은 유언하였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사람마다 다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전생과 금 생, 그리고 내생에까지 이어진 인연이 지극하여 끊어질 수 없는 사이를 삼생 연 분, 부부라 한다. 그것이, 오다 가다 쉽게 어우러진 사람이든, 우여곡적 뒤얽힌 끝에 어렵게 만 난 사람이든, 아니면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줄기같은 좌우 풍경을 데불어 거느리 고 만난 사람이든 한 번 부부가 된 연후에, 누구는 삼생보다 더 길고 깊은 한세 상을 누리어 살기도 하고, 또 누구는 삼생의 원수를 한 지붕 아래 둔 것처럼, 모 질고 그악스러운 평생을 겪기도 한다. "전생에 은인이나 원수가 금생에 부부로 난다는데, 은헤를 갚을래도, 원수를 갚을래도..

혼불 3권 (29)

자기가 죽은 것을 아직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지상의 양명 속에 선 둥치는 이미 베어져 죽었을지라도, 지하의 어둠 속에 뻗은 뿌리는 따로 살아 남은 것일까. 나무는 지상의 둥치와 지하의 뿌리가 그 길이나 모양이나 굵기가 똑같다고 하 니, 하늘을 찌르게 높았던 소나무의 푸른 꼭대기 그만큼 땅속의 땅 속, 저 깊은 어둠의 골에 뿌리의 끝은 닿아 있으리라. 헌데, 분수처럼 위로 솟구친 양분은 둥치가 잘렸으므로 더 가지 못하고 다시 뿌리로 내려간다. 그 소나무 정기가 뿌리의 끝끝까지 하얗게 어리어 백설기처럼 덩어리져 엉겨 있는 것이 바로 백복령이다. 캄캄한 땅 속의 뿌리에 무성한 가지마다 눈부시게 하얀 덩어리로 엉기어 있는 백복령의 한가운데는, 소나무 뿌리들이 꿩 꼬리마냥 박혀 있는데. 이런 나무 한 자리에서 ..

혼불 3권 (28)

폐일언허고 양반이라면 돈 세는 것부터 무어 이문이 남는 짓을 해서는 안되는 법 아니냐. 그런데 천성은 어쩔 수 없었던가,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는 짓을 그 렇게 했어.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바느질을 하거나 옷감을 짜도 꼭 내 몫을 따로 챙겼는 데, 헝겊 짜투리고 무엇이고 나한테 오면 금방 곽이 넘치곤 했다. 그런 내가 몹 시 기구허게 시집으로 신행을 가니 친정에서 마음 낳이 아퍼허셨드니라. 유표히 제 것을 챙기드니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신행을 간다고. 그렇지, 오죽이나 없었 으면 신랑까지도 없었겄느냐. 그런데 지금은, 부잣집으로 시집간 다른 형제들보 다 그래도 내 살림이 훨씬 낫니라. 이 살림은 허실이 하나도 없고 속이 꽉 차 있거든.“ 그때 바라본 청암부인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평화로워, 효원..

혼불 3권 (27)

깎은 손톱 발톱이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추려 모아 넉 장의 백지에 차례차례 싸고, 낙발을 싼 백지를 여미어 접는데, 옆에서는 오낭을 챙긴다. 붉은 명주로 만든 이 작은 주머니 다섯 개는, 얼핏 보면 앙징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그렇게 앙징스러워서 가슴 밑이 북받치는 설움은 더욱 크다.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머리카락, 부질없는 손톱 발톱까지도 이렇게 어여쁜 주 머니에 담아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거두어 망인은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홈실댁은 작은 붓을 들어 주머니마다 꼼꼼히,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구분하 여 적는다. 붓이 닿는 헝겊은 마치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헐렁하게 느껴진다. 그 래서 홈실댁은 문득 세필을 멈추고, 주머니를 가만히 눌러 보았다. 육신의 끄트 머리 손톱 발톱마저 이미 잡히지 않..

혼불 3권 (26)

이미 문지방을 넘어올 대 청암부인의 일별은 새각시의 됨됨이와 친정의 가르 침, 범절 등을 알아보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아직은 다 본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새각시는 청암부인 앞에 다소곳이 눈을 내리뜨고 서서 지극한 공경이 예를 다하여 공손히 평절을 한다. 두 손을 이마 위에 마주 대고 앉아서 하는 큰 절보다, 오히려 평절이 더 어렵다. 절을 하기 전에, 구름 위에 뜬 것처럼 날아갈 듯 가볍게 서 있는 모습은 전아 하고 맵시가 있어야 하며, 모으고 선 두 발도 안순음전해야 한다. 그리고 사르르 앉을 때는, 마치 꽃잎이 곱게 날아앉는 듯 소리없이, 꺾이거나 기우뚱거리지 않도록, 언제 앉는 줄 모르게 앉아야 하며, 두손을, 다소곳이 모아 눕힌 양 무릎 바깥쪽 방바닥에 내려놓을 때, 역시 살포시 어여쁘게 놓아야..

혼불 3권 (25)

머리 속에 만권 장서를 쌓아 놓은 것처럼 지견이 풍연한 부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가 마치, 따로 한 권의 책을 특별히 꾸며 두기나 한 듯, 온 문중의 기제사며 생일, 회갑 등을 안팎으로 다 기억하고 있는 청암부인에게, 사람들은 항상 공경과 어려움을 함께 느꼈다. 그것은 매안의 문중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씨 집안의 사가들과, 동제간의 반가에 있는 애사와 경사를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가, 거동을 하거나, 인사 물품을 보내거나, 아니면 편지, 혹 은 말로라도 예식을 갖추었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그 날짜들을, 단 한 번도 뒤섞이게 한 일이 없는 그네는, 꼭, 눈만 감으면 필요한 부분의 기록이 소상하게 펼쳐지는 사람같이 정확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다 외우시느냐고, 신기하다는 듯 문중의 질..

혼불 3권 (24)

5. 아름드리 흰 뿌리 구름인 양 쪽찐 머리 몇 해 되면 흙 되련가 아직 젊은 나이 숱이 많아 무성한 검은 머리에 자주 댕기 붉은 입술을 물릴 적에는, 그것이 곧 흙인 줄을 누구라서 알 리 있으리. 아침마다 참빗으로 찰찰이 빗어 내릴 때, 그 기름 돌아 흐르는 맑은 윤기는, 흡사 물오른 꽃 대궁같이 신신하여, 단을 자르면 그 자리에 금방이라도 투명한 진액이 어리어 묻어날 듯하지만. 그런 모양은 한낱 거짓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그날 보던 경대의 거울빛은 여전히 맑은데, 어느 하루 무심한 햇발이 비친 머 릿결은, 사위는 가을 풀처럼 기운이 없다. 그러다가 다시 보면 스산한 귀밑 머리 서리보다 희어, 말 그대로 상빈을 이루 니. 허망하다. 문득 명부의 습기가 시리게 끼쳐들어, 성근 머리 속이 더욱 수늘한데. ..

혼불 3권 (23)

“아이고, 그렁게 소코리나 조리에 쌀 일어서 두먼 물 떨어지능 거이나 같은 거이지요? 그래서, 방죽골양반은 영쇠가 일러 준 디다가 참말로 산소를 썼당가 요?” “썼제, 방죽골양반 아부님 산소를 그리 이장해 디렸제.” “그 말대로 되얐대요?” “하먼, 그렁게 멩사라고 안허능게비.” “그렁게, 당대에 삼백 석 추수를 바로 했드란 말이요?” “하아, 남노여비를 거느리고 호제끄장 두었드래.” “아이고, 그러먼, 또 그 당대에 참마로 조리쌀 털어 내디끼 그 재산을 다 엎 어 부렀으까요?” “방죽골양반 살아 계실 때까지는 그대로 했제잉. 그러다가 그 아들대에 어찌 어찌 스름스름 다 없어지고, 나중에는 그 다랭이 논 한 마지기만 남었드라네.” “아이고, 아까워라. 한 재산 이룬 거이 무신 꿈꾼 것맹이였겄네요.” “그..

혼불 3권 (22)

“에이, 그것은 잘못 아셌능갑소. 어뜨케 시신이 땅 속으서 재주를 넘는다요? 묻는 사램이 몰르고 깜빡 뒤집든지 엎었든지 헌 일이겄지.” 옹구네가 공배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공배는 “그렁가?” 했다. 처음에는 옹구네 말뽄이 얄미워서 눈을 흘기던 공배네도, 먼저 와 있던 평 순네도, 공배의 이야기에 섞여들었다. “그런디, 영회가 어쩐다고요?” 평순네가 묻는다. 그네는 자신의 남편이 곰배팔이인 것이 혹시 누구 산소를 잘못 쓴 탓인가, 해서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 영쇠가, 본디 여그 살든 백장이였는디, 그 아배 때도, 소도 잡고, 돼야지도 잡고, 개도 잡고, 다 잡었는디, 이 영쇠는 에레서부텀도 아배 일은 안 배울라고 그러고, 밥만 먹으면 휘잉허니 기양 나가 부러, 산으로만 댕겠드라네.” “멩사 될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