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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21)

“양반도 나름이여.” “양반 양반 허지 마시겨, 대대손손 영화 누린 양반이먼 멋 헌다냐. 인자는 너 나없이 창씨 다 해 부리고, 왜놈들 시상이 된 지가 벌쎄 몇 십 년인디, 무신 다 떨어진 양반이여? 천지가 다 개밍을 허는 판에. 그나저나 그 양반 초상나먼 우 리 배도 좀 부르겄그만잉.” “죄 받는다, 그리 말어라잉? 암만 왜놈들이 득세헌 시상이라 허드라도 조선 사람은 어디끄장이나 조선 사램이여. 그러고 조선 사램이 왜놈이름 부른다고 일 본 사램이 되능거잉가아? 껍데기만 그렇제. 이름이야 그께잇 거 머이라고 불르 든지 조선 사램이 어디 가든 안헝게. 우리는 우리 법 떠라야제. 양반이 그께잇 창씨 조께 했다고. 긴 거이 아닌 거이 되능가? 살어온 근본이 다 있는디.” 돌아앉아서는 재재거리던 거멍굴 사람들이..

혼불 3권 (20)

방안에서는 벌써 수시를 하고 있었다. 정갈한 햇솜으로 청암부인의 입과 코와 귀를 막고는 백지로 부인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그네의 좌우 어깨를 베로 단 단히 동이며 묶은뒤, 두 팔과 두 손길을 곧게 펴서, 그 두 손길을 부인의 배 위 에 올려 놓는다. 부인은 여자이니, 오른손을 위로 가게 하였다. 무감하고 담담한 손이었다. 이승에서의 한평생을 경영하던 두 손은 이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다만 하 나의 형체로 남아, 그 무엇에도 아무런 집착이나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으면 서 조용히 묶이고 있는 것이다. 그네의 두 다리를 반듯하게 붙여 곧게 펴고는 마지막으로 두 발길을 똑바로 모은다. 걸어오고 걸어온 길을, 또 걸어가고 걸어가야 하는 발이 고단하고 무심 하게 모아진다. 그 발목을 베로 동여 묶는다. ..

혼불 3권 (19)

“어머님,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율촌댁이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듯이 물었다. 청암부인은, 다급히 목 메이어 묻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이번에는 이기채가 청암부인의 팔을 잡고, 깊은 잠을 깨우는 사람처럼 불렀다. 그러자 그네의 입 모양이 둥그런 시늉을 했다. “어머님이 혹시 강모 찾으시는 거 아닐까요?” 율촌댁이 이기채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이, 강모 찾으십니까?” 이기채가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제서야 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끄덕이는 시늉이라고 해야 옳았다. 이기채는 잠시 망연하여 율촌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청암부인에 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는 그네가 이미 의식을 잃어버리고 만 뒤였다. 사람의 형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빈 껍..

혼불 3권 (18)

4 돌아오라, 혼백이여 밤이 깊어 고비에 이르렀다. 달빛 없는 반공으로 치솟은 노적봉의 검은 날개가, 무너지게 캄캄한 어둠을 쓸어 안으며, 금방 마을의 뒷등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하게 보인다. 깍아지른 바 위 벼랑과 숨은 골짜기,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수풀도 짙은 먹빛으로 무겁다. 마치 거대한 낟가리를 쌓아 놓은것 같은 형국이어도 노적봉이라고 부르는 산마 루의 드높은 능선이, 우줄 우줄 오늘따라 봉두처럼 어수선하다. 어둠이 한 치만 더 목에 차면 곧 난발을 할 기세다. 쌓여 있던 낟가리들이 검은 짚북더미 머리를 풀어 헤치며 우우우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그 허물어진 어둠이 거센 물살로 마을을 휨쓰는 소리가 공중을 가른다. 바람 소리다. 소스라쳐 다시 보면 산마루는 시커멓게 솟구쳐 오른 파도 꼭..

혼불 3권 (17)

삭막한 겨울의 밤하늘이 에이게 푸르다. 사람의 육신에서 그렇게 혼불이 나가면 바로 사흘 안에, 아니면 오래가야 석 달 안에 초상이 난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러니 불이 나가고도 석 달까지는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석 달을 더 넘길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 였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말이 영락없이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었 다. 운명하기 전에, 저와 더불어 살던 집이라고 할 육신을 가볍게 내버리고 홀연 히 떠오르는 혼불은 크기가 종발만 하며, 살 없는 빛으로 별 색깔이 맑고 포르 스름한데, 다름 사람들의 눈에도 선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는 그 모양이 다른데, 여자의 것은 둥글고 남자의 것은 꼬리가 있다. 그것은 장닭의 꼬리처럼 생겼다 한다. 어쩌면 남자의 불이 ..

혼불 3권 (16)

“내, 어쩌든지...강모를...보고 죽어야지.” 주문처럼, 헛소리처럼, 이 말만을 숨소리로 내며 버티었다. 율촌댁과 효원의 수발이 번갈아 잠시도 소홀하지 않은 중에, 삼시 세때 옹백 이에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쌀이 부스러져도 안되고 또골또골 하여도 안되게 정 성을 들여 청암부인의 죽을 쑤느라고, 효원의 손바닥에는 공이가 박혔다. 그것은 남을 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이가 박힐수록, 효원은 마음이 굳어지고 (할머님은 꼭 일어나시리라.) 싶어졌다. 쉽게 돌아가실 어른이면 이리하시랴. 그러다가 동짓달에 들어 청암부인 병세는 눈에 뜨이게 시름없어지고, 잠깐씩 이라도 정신이 들던 때와는 달리, 몇 날 며칠씩 그저 혼곤히 눈을 감고 있기 예 사였다. 그런데 오늘은 인월댁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혼불 3권 (15)

인월댁은 밤이고 낮이고 깨어 있었다. 어찌 잠든 날이 없었으리오마는 그네는 잠든 꿈속에서도, 오지 않는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월이 몇 해나 지나갔을까. 그네는 자신이 헛된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핏속에 어느새 기다림은 질긴 병이 되어 걷잡을 수 없는 뿌리 를 내리고 있는 것을 알고 말았다. “아짐, 저는 이제 내생이 있다고 해도 사람으로는 안 날랍니다.” “그럼...무엇으로 날라는가...?” “...아무것으로도 나지 않을랍니다. 그냥 이생에서 갚을 것 있으면 이 몸으로 다 갚어 버리고, 아무 인연도 짓지 말고, 원망도 남겨 두지 말고, 그저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이 소원입니다.” “...소멸...이라...” “이 멸렬한 목숨에 그나마 꿈이 있다면 소..

혼불 3권 (14)

3. 젖은 옷소매 청암부인은 혼곤한 잠에서 깨어난 듯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네의 발치 에 허연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인월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쌍헌...사람...” 입 속으로 숨소리처럼 남긴 한 마디는 그대로 인월댁의 가슴에 얹혀, 인월댁 은 그만 어깨를 꺾으면서 거꾸러져 체읍을 참지 못하였다. 청암부인은 쓰다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말게...나만 허면 한세상...자알 살다가 가는 것이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시는가요. 오래 살으셔야지요...오래...오래...살으...” “오래 살었네.” “인제부터 좋은 세상도 보고 복록도 누리셔야지요. 아짐...아짐이 이렇게 허망 하게 가셔 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으라고요...” “좋은 세상은 지금까지 다 살어 버렸어...더 ..

혼불 3권 (13)

허공에 떠 있는 강모의 마음을 붙들어매 두는 것이 겨우 장롱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어느 날부터인가 오유끼는 정신 없이 가구를 사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유 끼는 여염집 안방의 가구 집기를, 텅 빈 방의 한쪽에서부터 채워 넣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사람의 손때가 묻은 집안의 흉내를 내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늘 반짇고리를 가까이 두었다. 강모는 그녀가 사 달라고 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사 주었다. 돈을 구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모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그의 뒤에는 청암부인이 있었고, 이기채가 있었고, 들판 같은 논이 있었다. 이자 는 이자대로 복리로 쌓여갔다. 오유끼는 점점 살림과 가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방안의 세간이 하나씩 늘어갈 ..

혼불 3권 (12)

“나 갈라네.” 한 걸음을 떼며 목에서 밀어내듯 강모는 말했었다. “조심해서...” “응” 대답 소리가 목에 잠긴 채 갈라졌지. 사립문간에 강실이를 남겨 두고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에 , 뒤에서 비춰 주는 등롱의 불빛이 걸려 긴그림자를 만들어 주었었다. 마치 그림자가 자기를 이끌고 가는것 같았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가다가 뒤돌아 보며 “들어가아.” 하고 강모가 손을 들어 보였을 때, 그의 눈에는 등롱의 불빛만 어둠 속에서 주 황으로 번지고 있을 뿐, 강실이의 모습은 어둠에 먹히어 보이지 않았었다. 컴컴하게 솟아 있는 솟을대문에까지 와서 돌아보았을 때도 등롱은 그렇게 아 슴하게 비치고 있었다. 강모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강실이를 향하여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그러 면서 속으로...지금 강실이도 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