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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11)

"그러고오." 기응은 다시 말머리를 잡는다. "할머님도 이제는 연만허시다. 어른이 몸소 생산은 못하셨지마는 아드님이라도 손이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 하나를 독자로 두었을 뿐이니 마음에 근심이 크실 게 아니냐. 네 위로 누이가 둘이 있었다고 하나, 작은누이는 그렇게 실없이 일찍 죽어 버리고, 큰누리 강련이만 해도 온전타 허기는 어려운 사람... . 집안 내력이 이러고 보니, 네가 아직 나이는 어리다만 어른 노릇을 해야 할 처지다. 그저 종가집이 흥해야 문중도 흥허는 법,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백 리라고 네 한 몸이 너 하나의 몸만은 아닌 것이다. 어쨌든지, 이번 일은 할머님 말씀대로 해라. 아, 그러고 할머님이나 네 아버님이나 모두 손자도 기달리시는데, 네가 그 소원을 풀어 드려야지, 안 그러냐?" ..

혼불 1권 (10)

(... 강실이를 어찌 볼고... .) 강모는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었다. 어쩌면 강실이는, 그 우무질의 속속 깊숙 이 감추어지고 숨겨져 버려서 다시는 얼굴마저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도 마을은 낯설고 어색하였던가. 아아. 강모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 다. 그리고, 구로정의 둔덕에 서서 강실이의 집, 살구나무를 내려다보았다. 각성 바지들이 호제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민촌 거멍굴을 지나올 때도, 그들은 나락 을 찧다 말고 일손을 멈춘 채, 혹은 콩 타작 한 것을 도리깨질하다가, 연자매를 돌리다가, 강모의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다보았다. 무엇인가 부러운 듯한 시 선과 함께, 자기들끼리 한 말이지만 강모에게도 그대로 들리는 "얼매나 좋으까이... ." 그러더니, 아랫물, 중뜸을 지나 구로..

혼불 1권 (9)

"아나, 여기, 용을 그리다가 말었네. 마저 다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오니라. 식 혜나 한 그릇 먹자. 이얘기는 그때 허기로 하고." 기응은 꼭지연을 강모 쪽으로 밀어 주며 그렇게만 말하고 나갔다. 기응이 나 간 뒤, 벼루를 끌어당겨 붓을 적시었으나, 도무지 머리 속이 어수선하여 용이고 무엇이고 마음에 없었다. 그래서 나와 버렸다. "다 되얏네요. 이리 주시지요." 안서방은 부레풀에 개어 넣던 사기가루를 털며 강모의 손에 들고 있는 자새를 달라고 한다. 손바닥에서 푸르르 가루들이 반짝이며 날아 떨어진다. 어느새, 짧 은 겨울 해가 설핏 지려고 한다. 지대가 높은 산 밑의 집이라 그늘이 드리워지 기 시작하고 있다. "마님 지싱가... ." 대문을 들어서는 것은 아랫몰에 사는 타성 두 사람이다. 아마 세배를..

혼불 1권 (8)

"강모야." 청암부인이 목소리를 누르며 부드럽게 불렀다. 이기채는 크흐음 헛기침을 했 다. 기침 소리에 송곳 같은 힘이 들어있는 것이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 고 있었다. 마침 세배꾼이 뜸한 틈을 타서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섣달 들 면서부터 끊임없이 들고나던 사람들과 정초의 세배꾼 무리에 밀려 강모는 집안 어른들과 얼굴 마주칠 시간조차도 거의 없다시피 했었던 깃인데. "너, 대실에 다녀와야지?" 청암부인이 말끝을 누른다. 그러면서 윗몸이 강모 쪽으로 기울어진다. 강모는 그 서슬에 몸을 흠칠하며 뒤로 물러앉는다. 지금 청암부인의 말은 묻는 형식이 지만 속은 명령이나 한가지다. 강모는 묵묵히 장판을 내려다보았다. "설을 쇠었으니, 빙장어른, 빙모님한테 세배하러 가야지." 대답이 중치에 막힌다...

혼불 1권 (7)

3.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큰사랑의 누마루 아래 토방에서 안서방은 사기그릇 조각을 빻고 있다. 그는 이빨 빠진 대접과 접시 몇 개를 가져다 놓고, 하나씩 깨뜨린 뒤에 오목한 돌확 에다 절구질을 한다. 돌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뒷산 밑 계곡에서 주워 온 것 으로, 크기가 제법 맷돌만한데 가운데 부분이 저절로 패어 있어서, 갬치 먹일 사 기가루 빻는 데는 아주 제격이었다. 그 속에 그릇 조각을 집어 넣고는 손 안에 부듯하게 잡히는 굵은 돌로 잘게 부수면, 조각들이 밖으로 튀어 나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아 좋았다. 안서방의 손끝에서 몽글게 가루가 되고 있는 사기 조 각들이 겨울 햇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인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강모는 연자새 에 감긴 명주실을 만지작거리며 안서방이 하는 일을 내려다본다. ..

혼불 1권 (6)

"병풍만 뚫고 말았던가?"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고?" 모여앉은 부인들은 짓궂은 말꼬리를 이어가면서 웃었다. 효원은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드디어 버선을 벗어냈다. 콧등에 땀이 돋아나고 힘이 빠졌다. 갑자기 속박에서 풀린 발이 얼얼했다. 두 손으로 발을 감싸며 주무른 뒤, 그네는 다시 새 버선을 챙긴다. 초록 저고리와 붉은 치마로 갈아입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큰 비녀를 뽑더니 머리를 풀어 내린다. 숱이 많고 칠흑 같은 머리채다. 그네는 잠시 그러고 앉아만 있다. 네가 나를 어찌 알고... 나를. 그 생각이 다시 한 번 가슴속 에는 부뚜질하며 치밀어 오른다. 숨을 가라앉히려고 경대를 앞으로 당겨 뚜껑을 연다. 귀목판에 생칠을 하고 백동 장식을 붙인 경대의 거울이 일어선다. 거울 속 에는 더 깊은 어둠..

혼불 1권 (5)

'시자집안이종'의 명을 따라 안부가 신랑에게 기러기를 건네주자 신랑은 기러 기 머리가 안쪽으로 가게 들었다. "전아안." 기러기를 상 위에 얹어 놓으시오. 신랑은 기러기를 두 손으로 받들어 장인 허 담에게 준다. 허담은 청홍의 물감을 입은 나무 기러기를 받아 탁자에 놓는다. "북햐앙궤에." 북쪽, 정청 쪽을 향하여 신랑은 꿇어 앉는다. 기러기는 이 세상의 온갖 깃털 가진 새인 우와, 터럭 가진 짐승인 모와, 비늘 가진 물고기 린 중에서 유신을 천 성으로 지키는 새라 하던가. 그들은 겨울철에는 남쪽으로, 여름철에는 북쪽으로 철을 따라 다니는 수양조이다. 태양을 따르는 새인 것이다. 또한 한 번 맺어진 한 쌍은 서로 헤어지지 않고 똑같이 살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결코 다른 새와 다시 만나지 않는다. 참으로..

혼불 1권 (4)

2. 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 진주, 산호, 비취, 청옥, 백옥 밀화의 구슬들은 일룽거리는 촛불빛을 받아 오색 의 빛을 찬연하게 뿜는다. 금방이라도 좌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질 것처럼 소담 한 구슬 무더기가 꽃밭이라도 되는가, 실날같이 가냘픈 가지 끝에서 청강석 나 비가 날개를 하염없이 떨고 있다. 큰비녀를 감으며 양 어깨 위로 드리워져 가슴 으로 흘러내린 고운 검자주 비단 앞댕기도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다. 앞댕기에 물려진 금박과 진주, 산호 구슬들이 파르르 빛을 떤다. 마당을 가득 채우며 넘치 던 웃음 소리, 부산한 발자국 소리, 그리고 사랑에서 간간히 터지던 홍소의 소리 들도 이제는 잠잠하다. 온 집안을 뒤덮던 음식 냄새조차도 싸늘한 밤 공기에 씻 기운 듯 어느결에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혼불 1권 (3)

서로 잔을 들어 신랑이 위로, 신부가 아래로 가게 바꾸시오. 허근의 소리가 다 시 울린다. 이 순서야말로 조심스러운 것이고, 이제까지의 복잡하고 기나 긴 예 식의 마지막 절차이다. 또한 가장 예언적인 성격을 띠는 일이기도 하였다. 사람 들도 이때만은 숨을 죽인다. 하님과 대반은 술상 위에 놓여 있는 표주박 잔을 챙긴다. 세 번째 술잔은 표주박인 것이다. 원래 한 통이었던 것을 둘로 나눈, 작 고 앙징스러운 표주박의 손잡이에는 명주실 타래가 묶여 길게 드리워져 있다. 신랑 쪽에는 푸른 실, 신부 쪽에는 붉은 실이다. 그것은 가다가, 서로 그 끝을 정교하게 풀로 이어 붙여서 마치 한 타래 같았다. 이제 이렇게 각기 다른 꼬타 리의 실끝이 서로 만나 이어져 하나로 되었듯이, 두 사람도 한 몸을 이루었으니, 부..

혼불 1권 (2)

"초리청은 어쩝디여?" 점봉이네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마당으로 가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그 래서 시룻번을 한 입 급하게 베어 물고는 부엌 바라지 바깥으로 고개를 쑤욱 내 민다. 마당의 넓은 차일 아래에는 십장생이 그려진 열 폭 병풍이 붉은 해, 푸른 산, 흐르는 물과 상서롭게 웅크린 바위, 그리고 그 바위가 승천하여 떠 있는 구 름이며 바람 소리 성성한 솔과 소나무 아래 숨은 듯 고개내민 불로초, 불로초를 에워싸고 노니는 거북이, 학, 사슴 들이 온갖 자태와 빛깔로 호화롭게 펼쳐져 있 다. 그러나 아직도 구름은 아까만한 빛으로 해를 품은 채, 좀체로 해의 얼굴을 말갛게 씻어 주려 하지 않는다. 추수가 끝나고, 자잘한 가을 일들이 몇 가지 들 판에 남아 있기는 하나, 그런대로 큰손 갈 것은 대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