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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1)

혼불 1권 (1) 1. 청사 초롱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 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 로 몰리면서 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울타리 삼아 뒤안에 우거져 있 는 대밭이나, 고샅에 저절로 커오르는 시누대, 그리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왕 댓잎의 대바람 소리는 그저 언제나 물결처럼 이 대실을 적시고 있었다. 근년에 는 이상하게, 대가 시름거리며 마르기도 하고, 예전처럼 죽..

혼불 "나의 혼, 나의 문학" -최명희-

특별강연 "나의 혼, 나의 문학" -최명희- 1995년 10월 아주 어려서부터 오로지 소설을 쓰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던 제가 대한민국 문단에 공식적으로 등단한 것은 1980년 1월 1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쓰러지는 빛'이 당선하면서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저의 생애를 꿰뚫고 저의 덜미를 잡은 소설에 붙들린 것은 그 이듬해 1981년 5월 28일,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000만원 고료 장편소설 모집에 '魂불' 제1부가 당선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당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계속 쓰여지고 있는데, 많은 상금을 받고 당선한 작품을 이토록 오랜 세월 이어쓰는 형태의 이상한 작업은 아마 달리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魂불'의 자료를 수집하고, 구상, 구성, 준비한 시..

임꺽정 10권 (32, 大尾)

청석골에 남아 있게 된 두목과 졸개들이 대개 다 순경사 소문에 놀라고 안식 구 피난에 겁이 났지마는 대장과 두령들을 태산같이 밑어서 겨우 안심들 하고 있었는데 대장과 두령들이 버리고 가니 믿음의 태산으로 진정되었던 마음이 흔 들리고 들뜨고 뒤집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꺽정이가 떠나기 전에 술렁술렁 하던 청석골이 떠난 뒤에는 곧 난장판같이 떠들썩하여졌다. 오가는 사방 초막에 서 떠들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방문을 닫아 걸고 혼자 누워서 억제할 수 없는 고적한 생각을 마음속으로 곰새기었다. 청석골을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다 정 이 든 곳이요, 수하 사람은 어중이떠중이나마 수효가 자그마치 팔십여 명이건만 웬 셈인지 자기 신세가 게발 물어던진것 같았다. 처음에 마누라와 딸을 끌고 산 속 깊이 들어왔을 때 ..

임꺽정 10권 (31)

“저는 이 동네 삼좌올시다.” “그래 할 말은 무어야?” “저희 동네는 자래 루 빈동이온데다가 더구나 올해 같은 재년을 당하온 까닭에 지금 동네에 조석 끼니를 바루 먹는 집이 열의 두세 집두 안됩니다. 저희 동네 형편으루는 각항 지공두 하기 어렵솝지만 우선 산성 안 열세 집 식구를 맡아서 먹일 도리가 없소 이다.” “내 분부를 거행하지 못하겠다구 방색하는 말이냐.” “방색하려구 여 쭙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그러면 무어냐?” “산성 전후 좌우에 있는 동네 가 여럿 아니오니까? 다른 동네는 다 고만두구 여기서 가까운 마산리.사주리 두 동네만 가지구 말씀하더라두 두 동네가 다 저희 동네보다 호수두 많구 또 동네 두 포실합니다. 이 두 동네 사람을 부르셔서 저희와 세 동네가 산성안 사람들을 갈라 맡고 각항 ..

임꺽정 10권 (30)

도평 동네 존위의 집이 동네 중의 제일 잘 견디는 집이고 또 집도 큼직한 것 을 잘 아는 이춘동이가 일행을 그 집으로 인도하였다. 겉으로 위풍을 부리려고 동구 밖에서 봇짐에 싸가지고 온 병장기들을 꺼내서 혹 손에도 들고 혹 몸에 지 닌 까닭에 그 집에서는 아닌밤중에 난리가 쳐들어온 줄 알고 경겁들 하였다. 이 봉학이가 주인을 불러서 하룻밤 자고 갈 뜻을 말하고 경겁하지 말라고 안위를 시켰다. 주인이 늙어서 눈이 어둡든지 또는 놀라서 정신을 잃었든지 처음에는 이춘동이를 보고도 몰라보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이춘동이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자네가 마산리서 대장일 하던 춘동이 아닌가?” 하고 아는 체하였다. 주인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첫말에 배돌석이가 나서서 “아니꼽살스럽게 뉘게다 가 하게야.” 하고 책을 ..

임꺽정 10권 (29)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사랑방에 와서 여러 두령 중의 밖에 나간 사람까지 다 불러 모아놓고 상의한 끝에 박유복이.배돌석이.황천황동이.길막봉이.이춘동이 다 섯 두령이 두목.졸개 십여 명을 데리고 선진으로 가기로 대개 작정하고 짐짝에 서 가지고 갈 병장기들을 꺼내놓는 중에 꺽정이가 나와서 갈 사람 작정한 것을 듣고 이봉학이 더러 “자무산성으루 가는데 일체 일을 맡길 테니 자네가 선진을 거느리구 가게.” 하고 말을 일렀다. “아까 의논들을 할 때 유복이두 나더러 가 는 게 좋겠다구 말을 합디다만 나는 여기서 안식구들 길 떠날 준비를 시키려구 빠졌습니다.” “길 떠날 준비야 별거 있겠나. 여기 남은 사람이 시켜두 넉넉할 톄니 염려 말구 가게.” “녜, 형님 분부대구 선진을 맡아가지구 가겠습니다.” “그러구 오주는..

임꺽정 10권 (28)

청석골 두령, 시위 들은 박연중이 큰집 이간 사랑방에서 자고 꺽정이는 박연 중이를 따라 그 작은집 건넌방에 와서 같이 잤었다. 방이 단간이나 단둘이 자기 에는 비좁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식전 꺽정이가 기침하기 전에 시위들이 와서 대령하고 있었고 기침한 뒤 여러 두령이 와서 문후들 하고 가고 소세하고 조반까지 먹은 뒤 아들 백손이 가 문안하러 와서 일찍 올 것인데 의원 허생원을 불러다가 어머니의 병을 보이 느라고 늦었다고 말하고 어머니의 병을 고모는 산후발이라고 하는데 허생원은 감기로 집증하더라고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안식구들을 찾아보기겸 동네를 한 번 돌아보려고 백손이를 데리고 나섰다. 다른 두령들은 전날 들어오는 길로 식 구들을 찾아보았지만 꺽정이는 박연중이와 사랑방에 같이 앉았다가 잘 처소에 같이 ..

임꺽정 10권 (27)

두목과 졸개들은 어떻게 하느냐 의론이 났을 때 박연중이 사는 동네 형편이 두목, 졸개를 다 끌고 가면 우선 잠시라도 들여앉힐 처소가 없는데 추운 동절에 한둔도 시킬 수 없고 난처하다고 이춘동이가 말하여 신불출이, 곽능통이 두 시 위 외의 두목, 졸개 십여명만 뽑아서 데리고 가고 그 나머지 팔십 명 사람은 아 직 오두령에게 맡겨두자고 의론이 귀일하였다. 갈 바에는 한 시각이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고 또 청석골을 비다시피 하고 가는 것을 가근방 백성들에게라도 알 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날 밤에 밤길로 떠나기로 하고 말과 노새를 있는 대로 다 타고 가는 것이 좋고 또 군용에 쓸 재물을 넉넉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고 두령 외의 시위들까지 다 부담을 태우기로 하여 대무한 것만 꺽정이가 작정한 뒤 그외의 여러 ..

임꺽정 10권 (26)

오가와 김산이가 와서 두령 도합 아홉 사람이 자리들을 정돈하고 앉았다. 도 중에 중대한 회의가 열리는 까닭에 여러 두령이 다 정숙하였다. 그중에 몸이 고 단한 이춘동이는 어디 가서 눕고 싶으련만 그런 말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꺽정 이가 이춘동이의 온 까닭과 이봉학이의 낸 계책을 대강 이야기하고 끝으로 청석 골을 아주 버리고 가는 것이 도중의 중대한 일이라 여럿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 정을 짓겠다고 말하였다. 꺽정이 옆자리에 앉은 오가가 꺽정이를 돌아보며 “일 을 소상 분명히 알지 못하구는 의견을 말씀할 수 없으니까 일에 대해서 의심나 는 걸 먼저 좀 여쭤보겠소.”하고 허두를 내놓은 뒤 “지금 식구들 가서 있는 데가 위태할 것 같으면 식구들을 어디루든지 다시 피난시킬 것이지 우리들이 새 삼스럽게 피난갈 까..

임꺽정 10권 (25)

꺽정이와 이봉학이가 사랑에 같이 앉았다가 이춘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 째 오느냐, 무슨 연고가 있느냐 들이 연달아서 묻는 바람에 이춘동이가 꺽정이 에게만 겨우 절 한번 하고 이봉학이에게는 인사 수작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서 어제 재령읍에 들어가서 순경사의 동정을 알아보고 곧 밤길로 떠나온 사연을 일장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이춘동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이봉학이를 돌아 보고 “식구들은 여기 두었으면 아직은 아무 염려 없는 걸 공연히 피난시킨다구 순경사 손에 갖다가 넣어준 셈이 되었으니 저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식구들을 이리 도루 데려온단 말인가. 우리들이 마저 그리 간단 말인가?”하고 안식구 피 난시키자고 주장한 이봉학이를 탓하듯 말하니, 이봉학이가 머리를 잠시 숙이고 있다가 치어들고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