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28

혼불 5권 (50)

일부러 그렇게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리오. 여름 지나 가을 오면 서리 내리고 상로지사, 아비의 무덤에 찬 서리 시리게 덮이는 그 냉기가 흙 속으로 뻗치어 스미듯, 제 뼛속으로 끼치는 서슬은 만동이의 무릎을 더욱 여위게 하고 떨리게 하였다. 쑥대강이 같던 봉분의 잡초들이 누렇게 말라 시들어지며 하루아침에 짚북더미로 쓰러지다가 그나마 얼어붙어 저절로 죽어 버리는 겨울. 엄동설한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추위에 이빨이 부딪치는 것처럼 딱. 딱. 마주치게 시린 두 무릎을 베고. 이 허하고 하찮은 무릎을 베고. 어린 아들은 이토록 달고 깊게 자고 있는가. 아무 근심도 없이 모든 것을 아비에게 맡기고. 아부지도 이 귀남이맹이로 우주와 천지의 어린애로 돌아가서. 비..

혼불 5권 (49)

지달르시라고 간곡히 작별을 하고는, 자기가 공부했던 그 절을 찾어 또 질을 떠났단다. 여러 날을 걸려서 가고 가다가 어느 만큼에 다다라 잔등이를 넘는디, 아차, 여그가 바로 거그여, 그 동네. 어린 머이매한테 도시락 얻어먹고 즈그 아부지 묏자리 하나 써준 곳. 그 순간에 정신이 펀뜻 들었제. "그 아는 시방 잘 되얐능가 어쩠능가. 묘소나 한 번 들러 봐야겄다." 그런디 아 거그를 찾어가서 봉게 이놈의 묘소가 쑥대밭이 되야 부렀네. 풀이 엉크러져 우거져 부렀어. 봉분도 무너지고, 누가 언제 사람이 왔다 간 자취도 안 뵈이는, 임자 없는 무덤이 분명허드란 말이여. "참으로 괴이헌 일이로다. 내가 그때 공부헌 원리대로 자리를 잡었는디 이럴 리가 있능가. 설령 다소 빗나갔다 허드라도 이 지경에 이르다니. 이럴 ..

혼불 5권 (48)

"익어야제. 익어서 저절로 꼭지가 빠져야제. 설익은 재주에 코 깨지느 법이니라." 그런디도 야가 한 번 먹은 맘이라 들떠서 주저앉들 못허고 기어이 질을 떠났드란다. 금강산으로 들어갈 적에는 여나무 살 소년이었는디, 그새 구 년이나 세월이 흘러서 인자 의젓한 총객이 되야 갖꼬, 큰시님 밑에서 멩당 풍수 공부를 헌 사램이라 생김새도 점잖허니 보기 좋게 갖춰져서,절에서 떠날 때는 차림새 갠찮었는디, 강원도서 전라도 땅이라는 게 험허고 멍게로 걸어걸어 고향 찾어가는 질이 쉽들 안히여, 어쩌겄냐. 천리 질을 가는디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수중에 가진 돈도 없응께, 비렁비렁 빌어먹음서 밤에는 한뎃잠을 자고 낮에는 찌그러진 동냥치 다 된 꼴로 질을 걸었드란다. 그러다 하루는 어뜬 잔등이를 넘을라고 기진맥진 배가 고파..

혼불 5권 (47)

"아무나 죽어 갖꼬 멩당을 간당가?" "아 긍게 죽어도 심있는 양반 죽기를 지달를랑게 쉽들 안헝 거 아니요오. 송사리사 냇갈에 가먼 짝 깔렸지마는." "휘유우." "한숨 쉬지 마씨요. 부정타게 맘을 질게 묵어야제 그렇게 한숨으로 토막을 치면 쓰간디. 신명이 돌아보먼 방정맞다 그러시겄소." "저어그 대산면 한울리 이딘가는 시암 속에도 멩당이 있다고 허드마는. 그게 있을라면 그렁게도 있는 거인디." "헤기는." "아 그 왜 새비 자리 쓴 이얘기도 안 있소?" "그것도 그리여." 내외 마주앉아 한숨 섞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귀남이가, 꼭 만동이 어렸을 때 아비 홍술이를 올려다보고 묻던 모습으로 "새비 자리가 머이당가?" 고개를 반짝 치켜들며 물었다. "그렁 거이 있어." "있다고만 말고오." "이얘기..

혼불 5권 (46)

12. 아아,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은가  어찌하랴. 쉬흔에 낳은 아들 만동이를 장가들여 다시 그 아들을 본 홍술이 일흔도 훨씬 넘은 머리털을 허이옇게 눕히고 숨이 진 지 벌써 여러 해. 삼 년 지나 사 년 지나 어느덧 세월로 흐르는데, 아직까지 마땅한 곳에 그 유골을 옮겨 드리지 못한 만동이는, 아비의 한도 한이지만, 제 한세상 앞에 놓인 천골의 천함과,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또 다시 할아비와 아비가 그러했듯이 무부의 길을 터덕터덕 걸어가야 할 어린 놈의 허깨비 같은 생애가 뼛골에 맺혀서도, 부디 어서 아비의 뼈다귀를 질척하고 검은 어둠 속에서 건져내 고실고실한 양지녘의 해 바른 흙 속에다 안장하고 싶은 안타까움에 늘 가슴이 찝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좀체로 쉽게 오지 않았다. 겨울 가고 ..

혼불 5권 (45)

당골네는 무부와는 달랐다. 무당은 물론 더 말할 것도 없이 천하디 천한 팔천 중에 하나여서, 그 신분으로만 보면 짐승 잡는 백정이나 한가지지만, 그러나 백정과도 다르고 또 함께 사는 서방인 무부와도 좀 다른 것은, 무업의 주를 맡고 있는 사람이 당골네 무당인지라, 그들은 만일에 용하다고 이름이 나면, 궁중에서도 부르고, 권세 높은 재상가나 돈 많은 장자의 집에서도 부르니. 때로는 덩을 타고, 때로는 다소곳이 따르는 대갓집 시비를 앞세워 거느리고 태깔 내어 걷는 품은, 얼핏 한다 하는 사대부의 부인 못지않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만한 곳에 드나드는 당골네라면 복채도 상당하여. 보패도 화려하고 비단 명주 피륙도 색색깔이라, 솜씨 좋은 집에 삯을 주어 맡기면 날아가는 바느질은 꿰맨 자국 흔적도 없게 지어내니, ..

혼불 (5권)

혼불 5권 지은이:최명희 출판사:한길사   1. 자시의 하늘  자시가 기운다. 바람끝이 삭도같은 섣달의 에이는 어둠이, 잿빛으로 내려앉는 겨울 저녁의 잔광을 베어 내며, 메마른 산과 산 능선 아래 움츠린 골짜기로 후벼둘고 헐벗은 살이 버슬버슬 얼어 터지는 등성이와 소스라쳐 검은 뼈대를 드러낸 바위 벼랑 허리를 예리한 날로 후려쳐 날카롭게 가를 때, 비명도 없이 저무는 노적봉은 먹줄로 금이 간 몸 덩어리를 오직 묵묵히 반공에 내맡기고 있었다, 어둠의 피는 검은가. 휘이잉. 칼날의 서슬이 회색으로 질린 허공에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노적봉 가슴패기에 거꾸로 꽂히자, 그 칼 꽂힌 자리에서는 먹주머니 터진 듯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져 났다. 바람이 어둠이고, 어둠이 난도였다. 어지러이 칼 맞은 자리마다 언 ..

혼불 5권 (44)

얼굴이 고우면 무엇하고 태깔이 있으면 무엇에 쓰랴. 사내로 세상에 나서 반듯하게 책상다리 개고 앉아,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경세제민, 공부를 한 번 해 본 일도 없고, 그것이 아니라면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온뭄에 땀흘리며 구리 같은 팔뚝으로 논을 갈고 밭을 갈아 농사를 지어 본 일도 없고, 쇠푼 한 닢이라도 더 벌어서 돈궤를 무겁게 채우는 기쁨으로 무슨 장사를 해 본 일도 없이, 그저 한세상을 제 아낙의 뒷전에서 이런 저런 굿판의 치다꺼리를 하며, 허구한 날 기껏해야. 사람 사는 세상의 땅 어디에도 부빌 곳 없는 마음을 검은 강, 검은 하늘 너머, 구천에서 맴도는 귀신한테다 메인 목을 놓아 부벼 보니. 아, 세상이 이렇게도 허한 것인가. 전에 홍술이는 쉬혼에야 얻은 자식 만동이의 조그만 낯바닥..

혼불 5권 (43)

"아부지, 나는 크먼 나중에 머이 된당가?' "너도 나맹이로, 인자 각시를 얻으면 무부가 되제잉." "당골 각시 안 얻으먼?" "안 얻을 수가 있간디? 당골네 집안은 꼭 당골네 집안끼리만 시집가고 장개가고 혼인을 허는 거이여, 그거이 벱이여." 무당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과는 혼인할 수 없다고,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당골네 무당의 집안끼리 무계혼만을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을 낳으면 훗날 그는 무부가 되고, 딸을 낳으면 무녀가 되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자 살어 보그라. 살자먼 설운 일 많은 거이 한세상이라, 여늬 사람도 이 세상을 진세상이라고, 울고 울어서 질퍽헌 세상이라고, 눈물이 젖어서 무겁다고 허는디, 조선 팔도에 팔천 사천 무..

혼불 5권 (42)

11. 나 죽거든 부디 투장하여 달라  버석. 버스럭.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가 음습한 주홍의 등잔 불빛이 번진 방안에 오싹할 만큼 커다랗게 울린다. 그것은 불빛이 구겨지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무명씨 기름으로 밝힌 등잔의 불빛은 그 주홍에 그을음을 머금고 있어. 됫박만한 방안의 어둠을 환하게 밀어낸다기보다는 오히려 벽 속에 스민 어둠까지도 깊이 빨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주홍을 내쉬고 어둠을 삼키는 등잔불 혓바닥이 제 숨결을 따라 팔락. 파르락. 흔들린다. 그 불빛을 받으며 등잔 아래 숨을 죽이고 앉아. 무엇인가를 창호지로 싸고 있는 당골네 백단이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후드르르 떨린다. 어두운 불 그림자가 흰 창호지에 검은 손가락 무늬를 드리운다. 버스럭. 버스럭. 뭉치가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