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28

혼불 5권 (31)

"어. 시끄럽네. 지가 헌 말은 생각을 못허고. 소가지라고 꼭." 오금박는 목소리로 쥐어박는 임서방 말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지만. 임서방네는 강실이 혼수 화장품 말을 꺼냈다가 들은 이야기라. 혼자 머리 속으로 그 이야기에 나오는 큰애기와 강실이를 섞바꾸어 세워 놓아 보았다. 인연은 모르는 거이라는디. 하면서. 왜 그랬는지 그네는 강실이가 아주 가련하게도 집에서 내쫓기어 수악한 머슴한테로 시집을 간다면 누구한테로 가며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도무지 거짓말로라도 그 모습을 떠올려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네는 되작되작 원뜸의 종가에 있는 상머슴에서부터 매안 마을 집집마다 한 집씩 더듬어 가며 상머슴. 중머슴. 물담살이. 깔담살이. 그리고 노비들..

혼불 5권 (30)

험서 옆에 나란히 누워 온갖 소리로 세세허게 달래고 소청을 히여. 그러고는 이불을 떠들고 같이 자자고 들올라고 허네. 김도령이 아까맹이로 이불을 움켜쥐고 안 놈서 못 들오게 히여. 큰애기를 그렁게 큰애기는 그러지 마시라고 제가 어머이 잘 모시고. 효도도 헐 거잉게 마음을 돌리시라고 빌었제. 그래서 이불을 못 벳겨. 김도령이 안 벗어. 캉컴헌 이불 속으서 똑 숨이 맥혀 죽겄는디 지침도 못허고. 메주 띄우디끼 잔득허게 몸뗑이를 띄움서 참고 있능 거이라. 큰애기가 아무리 애원을 해도 쇠용이 없어. 큰애기는 즈그 아부지를 생각해서 어쩌든지 새어머이 마음을 돌려 볼라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이제. 근디 안되야. 새복녘이 다 되드락 땀이 나게 공을 딜이다가. 해도 해도 안된게 지쳐 갖꼬 큰애기가 기양 그 옆으서 꼬..

혼불 5권 (29)

그리고 어머니가 건네주는 병을 받아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우데나' 도마도 화장수였다. 병 모양이 마치 도마도 같아서 붙은 이름이리라. 안개로 빚은 유리병인가. 볼그롬한 살구꽃빛 연분홍 화장수가 애달플 만큼 곱게 비치는 병의 앙징스러운 뚜껑은 노랑색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수줍은 봄을 맞이한 꼬막각시 같은 병의 조그만 모가지에는 진초록 이파리를 종이로 만들어 실을 달아 걸어 놓았다. 네가 이대도록 고와서 무엇에다 쓸거나. 강실이는 저도 모르게 그 빛깔에 물들면서 한숨을 지었다. 웬만한 집안의 처자는 혼수품으로 반드시 장만한다는 방물장수의 말이 아니라도 이처럼 어여쁜 화장품이라면 누가 탐내지 않으랴. 그러나 그것은 어여뻐서 오히려 한없이 서럽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손안에 들고 있으면서도 아득..

혼불 5권 (28)

강실이가 초사흘을 넘기고 동계어른 이헌의에게 세배를 하러 갔을 때. 마침 한 무리의 집안간 동종들이 먼저 왔다 돌아가고 그의 재종 이징의만이 헌의와 사랑에 대좌하여 담소하고 있었다. "그래 올에는 부디 몸도 충실허고 마음먹은 대로 모든 소원을 다 성취허도록 해라." 세배를 받는 이헌의는 그 앞에 다소곳이 앉는 강실이를 보고 고희를 넘긴 지 여러 해 된 노안에 실뿌리같이 드리워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머금은 음성으로 덕담을 해 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붙였다. "꼭 시집도 가고." 이 말에 강실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수그렸다. "가만 있자. 네가 인제 올에 몇 살이더라? 무슨 생이던고?" 나이를 묻던 그는 손가락을 짚어 보고는 잠시 침묵하였다. "농사도 때가 있고 인사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실..

혼불 5권 (27)

"그 이야기에서도 나름대로 건질 것은 있으나 역사를 거꾸로 더듬어 유추해 보면 전혀 다른 면이 확연히 잡힌다. 우선 무왕이 누구인가 보자. 그는 백제 제이십구대 법왕의 아들이요 제삼십대 의자왕의 아버지인데. 그의 아버지 법왕 시대에 백제는 그 당시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한 나라였어. 그래서 법왕 시절에 영토 확장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지. 그래서 자연히 신라 변방을 많이 치게 되었는데 신라로서는 괴로운 일이지. 이때 백제 법왕은 후손에 왕통을 이을 적자가 없었다. 무왕은 서손이었어. 그러니까 법왕이 마한족의 여인을 비로 맞이하여 낳은 아들이 백제 무왕이었지. 물론 어려서야 아직 무왕이 아니지만. 그는 서자였기 때문에 그때 사비성에 살지 않고 자기 어머니인 마한족이 살던 이리 익산 옆 금마성에 어머니하고..

혼불 5권 (26)

8. 인연의 늪  신라 성골 진평대왕은 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어 그 키가 십일 척이나 되었다. 그래서 곤룡포를 지으려고 비단을 펼쳐 놓으면 방안이 마치 넘실거리는 붉은 바다 같았다. 그리고 늠름한 가슴과 우뚝 솟은 두 어깨에 발톱이 다섯 개 달린 황룡의 꿈틀거리는 무늬를 금실로 수놓은 용포를 입은 그의 위용은 흡사 붉은 구름 속의 산악 같았다. 하루는 왕이 창건한 내제석궁 천주사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그 힘에 돌계단 두 개가 한꺼번에 부서졌다. 이에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날에 오는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를 본 사람들은 왕의 힘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 찬탄하며 깊이 흠모하고 우러르니.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

혼불 5권 (25)

어뜬 놈은 책상다리 점잖허게 개고 앉아서 발부닥 씰어 감서 공자왈 맹자왈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노래를 부름서. 글이요, 정신이요. 허능 거이여? 시방. 양반은 즈그 문짜로 글 읽어야 살고. 정신 갖춰야 살겄지마는 상놈은 상놈대로 젓사라고 외어야 사능 것을 살자고 지르는 소리를 패대기쳐? 여그가 어딘디? 그래. 여그가 어디냐. 여그가 어디여? 사람 사는 시상이다. 사람 사는 시상에 사램이 사람끼리 이렇게 서로 틀리게 살어야니. 이게 무신 옳은 시상이냐. 뒤집어야제. 양반은 글 읽어서 머에다 쓰고, 그 좋은 정신은 시렁에다 뫼셔서 무신 생각을 허능고? 상놈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암서. 왜 그렁 것을 몰라? 무단히 공부라고 헛짓하고 있능 거이제. 춘복이는 그 이야기 속의 샌님을 새우젓 장수처럼 방죽에 ..

혼불 5권 (24)

"달 봤다아." 춘복이는 거멍굴 동산의 꼭대기 바위 날망에 올라 두 다리를 장승마냥 뻗치고 선 채로 두 팔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 올리며 부르짖었다. 그 소리는 사나운 산짐승이 달을 보고 잡아먹을 듯이 응그리며 무서운 용틀임으로 으르렁거리는 것같이 들렸다. 아니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오래 참고 참아 온 울음을 한 목에 터뜨리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달 봤다아야." 비명에 가까운 춘복이의 고함소리가 동산을 뒤흔들며 공중에 울릴 때 함께 올라온 거멍굴 사람들은 달을 향해 넙죽이 큰절을 올렸다. 소원을 비는 것이다. 해가 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할랑거리며 고리배미로 앞서 간 옹구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정 택주네 붙이들과 당골 백단이네 푸네기, 그리고 공배네 내외, 평순네들이 우줄우줄 뒤섞인 거멍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