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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6권 (12)

“날이 차차 더워 가면 옷 해놓은 건 어떻게 하나.”“옷 보내기가 급하면 신 서방더러 먼저 갖다 두고 오라지요.”“그렇지만 이왕 가려는 길을 자꾸 늦춰서 쓰겠나.”백손 어머니가 말대답하기 전에 천왕동이가 먼저 “내 길은 늦추라구 형님 길을 늦추지 말라우. 애기 어머니 차치구 포치구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내가 내일 갈까 보우.”하고 웃으니 애기 어머니도 웃으면서 “귀양살이까지 하 구 지각 좀 났을 줄 알았더니 전이나 마찬가지로군.”하고 대꾸하였다. 이내 정 당한 말은 그치고 실없은 말이 나서 한동안 여럿이 함께 웃고 떠들다가 정밤중 에 돋는 달이 높이 올라온 뒤 비로소 잘 자리들을 보게 되었다. 이튿날 식전에 애기 어머니가 백손 어머니를 데리고 천왕동이의 옷 지을 것을 의논하였다. “바지 저고리 두루매기..

임꺽정 6권 (11)

8 양주 임꺽정이는 아비 병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 겨우내 집을 떠나 지 못하였다. 사람의 목숨이 모질어서 숨만 붙은 병인이 죽을 듯 죽지 않고 하 루하루 넘기어서 온겨울을 다 지냈다. 미음을 떠넣어도 맛 모르고 삼키던 병인 이 개춘이 되며부터 조금 조금 나아서 중동밥까지 달게 먹게 되었다. 아비 병이 그만한 뒤에 꺽정이는 칠장사 선생을 보러 가려고 하는데 애기 어머니가 노인 시아버지에게 옷 한 벌을 지어 보내겠다고 말하여 꺽정이가 옷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임진별장 이봉학이게서 전인으로 편지가 왔는데, 언문이나 똑똑히 볼 사람이 없어서 애기 어머니가 이웃집 최서방에게 가서 술 한 사발 사주고 편지 를 보아왔다. 그 편지에 안부의 사연은 기쁜 소식을 들려줄 것이 있으니 놀기 겸하여 나오라고 ..

임꺽정 6권 (10)

예방비장은 엉겹결에 일어 앉고 장교들은 앞을 다투어 들어왔다. 김양달을 여 러 손으로 떠받들어 반듯이 눕힌 뒤에 목에 박힌 칼을 뽑아주는데 선지피가 내 뿜듯 나와서 칼을 뽑던 장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오는 피를 막으려 고 머릿수건을 목을 친친 감아주었더니 눈을 꽉 감은 김양달의 목에 감긴 수건 을 잡아 뜯으며 머리를 흔들다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둘러보며 “나는 죽기 다짐 두구 왔다. 그래서 죽는다. 처자식은 사또께......”말하다가 말끝을 못 마치 고 입을 다물었다. 예방비장이 그제사 앞으로 가까이 앉으며 “김여맹 이게 무 슨 짓인가. 여보게 정신 차리구 내 말 좀 듣게. 내가 말을 과히 했네. 용서하게, 김여맹”하고 지껄였으나 김양달은 흰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김양달 의 코에..

임꺽정 6권 (9)

“저는 이 집 주인의 아들이올시다. 이왕 누추한 곳에 행차하셨으니 잠깐 들어 앉으시지요. ” “들어앉을 것 없이 바루 가겠네. ” “술이나 떡이나 좀 잡숫구 가시지요. ” “내가 술은 끊었구 떡은 즐기지 않네.” “돼지다리두 있구 소머리두 있습니다. 고깃점이라두 좀 잡숫구 가십시오.” 김양달이 도야지고기를 즐기는 까닭에 속으로 침은 삼키면서 겉으로 “폐 끼칠 것 없네. ” 하고 말하였더니 “천만의 말씀이지 무슨 폐오리까.” 젊은 주인이 청할 뿐 아니라 “금교 제일 부자집에 폐 좀 끼치셔두 좋습지요.” “젊은 무당의 소리나 한마디 듣구 가시지요.” “그대루 가신다면 주인이 무안하여 합니다.” 행인들이 입을 모아 권하여서 김양달은 마침내 장교들을 돌아보며 “주인이 초면에 하두 정답게 하니 잠깐 들어앉았다 가..

임꺽정 6권 (8)

“우리 성주받이 구경이나 가세. ” “뉘 집에서 성주를 받는다든가? ” “어물전 주인 살림하는 집 문 앞에 황토 펴놓은 것 보지 못했나? ” “황토를 펴놓았기루 꼭 성주를 받는지 어떻게 아나? ” “내가 아까 이 집 주인에게 물어봤네. ” “이 집 안주인이 어딜 가구 없나 했더니 성주받이 구경갔다네그려. ” “우리 가보세. ” 하고 행인들끼리 지껄인 다음에 “성주받 이 구경 안 가실라우? ” “우리 가서 무당년의 낯바대기나 보구 옵시다. ” “ 자, 갑시다. 일어들 서시우. ” 하고 장교들을 끌었다. 행인 중의 늙은 사람 하나 와 장교 중의 조심 많은 사람 하나만 떨어지고 그 나머지 행인과 장교가 다 성 주받이 구경을 가는데, 짐꾼, 말꾼 몇 사람까지 함께 묻혀 갔다. 늙은 행인이 남 은 장교를 보고 “..

임꺽정 6권 (7)

“소인까지 마저 잠이 들었더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이놈이 객주 주인의 동생이 란다. 객주루 끌구 가자.” 김양달이 도적을 장교들에게 내맡기고 장교들의 앞을 서서 객주에 와서 보니 대문밖에 짐꾼, 말꾼들이 웅끗쭝끗 나섰는데 객주 주인도 그 틈에 끼어 섰었다. 김양달이 장교들을 돌아보며 “형놈두 도망하지 못하게 잡아놔라.” 이르고 사처방으로 들어왔다. 앉아 있 는 예방비장이 김양달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말 한마디를 아니하여 김양달은 주저주저하고 섰다가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서 예방비장의 찌푸린 상을 바라보며 “놀라셨지요?” 하고 먼저 말을 붙였다. “여보게 김여맹. 밤중에 어디 갔다 왔 나?” “잠깐 밖에 나갔었습니다.” “장교들의 말을 들으니까 초저녁에 나갔다 는데 지금 정밤중이 지났는데 무슨 놈의 잠..

임꺽정 6권 (6)

2 섣달 초생에 평안 감영 예방비장은 서울 보낼 세찬을 분별하느라고 여러 날 동안 분주하였다. 세찬 보내는 곳이 많아서 촛궤와 꿀항아리만 서너 짐이 되고 이외에 또 초피, 수달피, 청서피 같은 피물이며, 민어, 광어, 상어 같은 어물이며, 인삼, 복령, 오미자 같은 약재며, 면주, 면포, 실, 칠, 지치, 부레 같은 각색 물종 이 적지 않아서 세찬이 모두 대여섯 짐이 되는데, 여기다가 상감과 중전께 진상 하는 물건과 세도집에 선사하는 물건을 함께 올려보내자면 봉물짐이 굉장하였 다. 세찬을 다 봉해 놓은 뒤에 예방비장이 감사께 들어가서 세찬 봉물 끝마친 사연을 아뢰니 감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제 일간 곧 올려보내도록 해보세.” 하고 말하였다. “진상 봉물두 함께 올려보내시렵니까?” “그럼 함께 보내려구 ..

임꺽정 6권 (5)

손가는 곧 서림이를 불러서 박유복이에게 인사를 시킨 뒤에 박유복이와 길막 봉이의 뒤를 따라 오가의 집으로 왔다. 손가가 서림이를 사랑 바깥마당에 세우 고 먼저 사랑에 들어가서 오가를 보고 다시 서림이의 일을 이야기하니 오가가 박유복이와 길막봉이를 돌아보며 “우리 그자를 불러서 말을 한번 자세히 들어 보세.” 말하고 곧 손가더러 불러들이라고 일렀다. 서림이가 사랑에 들어와서 오 가에게 절인사하고 무릎을 꿇고 앉으니 오가가 편히 앉으라고 말하고 나서 바로 “노형 뒤에 큰 재물이 있다니 그 재물이 지금 어디 있소?” 하고 물었다. “차 차 말씀하오리다.” “차차 말한다구 사람이 갑갑증이 나게 하지 말구 얼른 이 야기 좀 하우.” “그 재물이 지금은 평안 감영에 있습니다. 그러나 섣달 보름 안에 서울루 올라옵니..

임꺽정 6권 (4)

서림이가 막봉이를 향하고 공손히 절하는데 엎드리고 일어나는 것을 작은 손 가가 거들어주었다. 막봉이가 서림이의 절하는 것은 본 체 만 체하고 작은 손가 를 바라보면서 “그대루 보내지, 왜 데리구 왔어 보따리를 찾아 달라든가?” 하 고 물으니 작은 손가가 고개를 가로 흔들며 “아니오. 사례하러 오셨소. 아주머 니하구 나하구 집으루 가시자구 말하니까 두령께 와서 죽이지 않은 은혜를 사례 하구 가신다구해서 아주머니만 먼저 집으루 가시게 하구 나는 이리 뫼시구 왔 소.” 하고 대답하였다. “사례는 고만둬두 좋지.” 막봉이 말끝에 “죽게 된 건 내 잘못이구, 살려주 신 건 두령의 은덕입니다. 나를 낳아준 이두 부모요, 나를 살려준 이두 부모라니 두령은 곧 나의 부모신데 내가 정신을 차리구서야 먼저 와서 보입지 않..

임꺽정 6권 (3)

서림이는 도적들을 막을 힘이 없는 까닭에 하릴없이 보따리를 벗어놓았다. 물 건을 빼앗기는 것도 아깝거니와 헌옷가지라고 거짓 말한 것이 뒤가 나서 속으로 조급하였다. 속으로 조급할수록 겉으로는 더욱 태연한 체하고 도적들이 앉히는 대로 쪼그리고 앉아서 보따리 푸는 걸 보고 있었다. “피물 아닌가.” 한 도적이 겉에 싸인 수달피를 잡이 헤치니 “옥돌 보게.” 다른 도적이 속에 잇던 옥노리 개를 집어들었다. 도적들이 서림이를 돌아보며 “이것이 헌옷이냐?” “고따위 입에 발린 거짓말을 우리가 곧이들을 줄 알았느냐!” “너 같은 멀쩡한 놈은 성 하게 보내지 않을 테다.” “다리 마등갱이를 퉁겨줄 테다.” 하고 둘이 받고채 기로 역설하는데 서림이는 대꾸 한마디 않고 직수굿하고 있다가 도적들이 보따 리 속을 다 뒤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