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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2권 (29)

우대용이와 길산은 영문을 몰라서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의 아낙이 날 찾아왔던 것 같소." 길산이 놀라서 물었다. "내 아내라니오?" "장뭣이라는 살인 도적이 참형되었다던 날 밤이었서. 남장을 한 여인네가 내 우거루 찾아왔었지요. 주인의 넋을 위무하겠답디다." "묘옥이..." 길산의 눈에 물기가 가득하게 괴었다. 여환이도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묘옥이 찾아왔던 날 밤의 일을 얘기하였다. 둘이서 말바위에 올라 갔던 일, 그 여자가 뛰어내리려는 것을 만류하던 일, 이제는 아무 곳에도 붙일 데가 없다며 한탄하던 일들을 자세히 말하는데, 길산은 두 빰 위로 굵은 눈물방울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두 다 있지." 여환이 염주를 헤아리면서 탄식하였다. "어디루... 간다고는 말 없습디까?" "..

장길산 2권 (28)

학선이가 재빨리 말에 올라 달아나는 군졸의 뒤를 쫓아갔다. 군졸은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뛰는데 워낙 눈길이 미끄러워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 뛰고 또 엎어지니, 얼마 못 가서 학선이가 탄 말이 바로 등뒤에까지 다가들었다. 학선이가 환도를 쳐들었다가 군졸의 어깨에서 아래로 죽 그어내렸다. 핏방울이 튀어오르면서 군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학선이는 말을 몰아 지나 되돌아 달려오면서, 이번에는 군졸의 배를 바라고 힘껏 찌르니 칼을 배에 박은 채로 쓰러지고 만다. 대번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눈을 붉게 적시면서 번져갔다. 학선이는 말에서 내려 잠깐 동안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가래침을 돋구어 뱉었다. 그가 칼을 뽑아내어 눈에다 비스듬히 박았다가 몇번 씻어낸 후 발끝으로 눈덩이를 죽 떨어내고는 칼집에..

장길산 2권 (27)

"송도 체장이로군! 그러면 그렇지." "저 나장이 우리에게 이것을 알리려는 연유는, 혹시 국문할 때에 우리가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요. 잘 생각해서 해냅시다." 길산이 말하였고, 우대용이도 잠들 생각을 잊고 벽에 기대어 앉아 못내 감탄하는 것이었다. "대근이 성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구 있었지만, 참으로 처하의 대장부로군!" "자 일찍 자둡시다. 내일은 먼길을 걷게 될 것 같소." 그들은 짚더미에 몸을 파묻고서도 못내 잠이 오질 않았다. 길산은 아버지와 갑송이의 얼굴을 떠올렸고, 애인촌의 낮은 돌담이며 광대산 솔숲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는 탐스럽게 피어난 박꽃 같은 묘옥의 희고 둥근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와 벗은가슴이며 젖무덤 사이의 연비 자국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장길산 2권 (26)

학선이의 어명이란 말이 떨어지자 도사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압송장의 내용에 본즉 이미 장계를 통하여 신원이 알려졌다는데 어떤 자들 말씀이오?" "그자들은 형조에서도 파악한 바와 같이 지금 감영 옥에 갇힌 우대용이라는 자와 임춘삼이라는 자요." "예, 저두 대략 보아 알고 있습니다." "서울에 압송하여 판의금과 각부 판사 지사 대감들을 모시압고 추국을 열라는 지엄한 붑부를 받잡고 왔소이다." "지금 형옥이 일어나고 있소이까?" "그렇소, 하루가 급합니다. 내일 사또께 현신하여 말씀드리고 곧 압송 거행할 테니 동행을 바라오." 길산이 독칸에 갇히고 나서야 곳에 갇혔던 자가 자기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송도 박대근이가 우선 길산의 목숨을 살려놓기 위해서, 옥사장에 돈을 쓰고 대시수로 바꾸..

장길산 2권 (25)

"인젠 이 갑갑한 털벙거지와 더그레를 벗어두 되겠습니까?" "안된다. 완전히 익힐 때까지 좀더 연습을 해둬야겠다. 사릉장 다루는 것두 그렇고... 어이 나장, 자네는 나졸들이 죄인을 꿇린 다음에 무엇을 하라고 그랬었지?" "죄목을 외치라 하였던가요?" "예끼 이놈, 내가 위에서 하는 말을 받아 복창 거행하라구 그랬잖느냐." "성님, 저희들두 이젠 지쳤습니다. 좀 쉬어가며 합시다." "그래, 행수 성님께서 오셔서 점심을 들려던 참이다." 춘래와 계집종이 겸상과 원반을 차례로 들고 들어왔다. 학선이와 대근은 상을 마주하고 반주로 몇잔 걸치는데, 학선이가 한양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학선이 한양에 이르러 먼저 한 일은 판의금 댁을 알아내는 일이었고, 알아내자마자 사직골의 대감 댁 앞에다 사관을 정하였다. ..

장길산 2권 (24)

"싫으면 관두라지. 길구 짜른 건 대봐야 안다구 힘겨루기에 씨름말구 뭐가 있어?" "진 놈이 그래두 성님 소리 하긴 싫어서... 좋다 하자꾸나?" 마감동이와 졸개들은 비록 갑송이가 천하장사라는 말은 들었으되 여태껏 직접 본 적은 없었더니, 총각과 기운겨룸 하는 양을 보고는 완전히 안심을 하게 되었다. 갑송이가 졸개들에게 명하여 눈을 치우고 판을 정리하라 일렀다. 판 수습이 된 연후에 두 사람이 마주섰다. "샅바가 없으니 통씨름으루 하자." 총각이 말했다. 씨름은 왼씨름, 오른씨름이 있는데 이는 서로 고개를 엇돌리는 방향을 이름이요, 샅바 없이 바지허리를 잡고 할 적에는 통씨름이라 하는 것이다. 총각이 갑송이의 허리를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은 허벅지에 얹었고 갑송이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래 안쪽으루 걸..

장길산 2권 (23)

"좋소이다. 이제 나으리의 마음을 알았으니 더이상 권하지는 않겠고, 녹림패의 의리를 고집하여 칼을 뽑지두 않겠소이다. 그러나 다만 가족들의 정상이 딱하니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에 이사를 하여 안돈시켜드리리다." "이두령의 은혜를 두 번이나 입었으니 어찌 다 갚겠소." "자, 이 밤을 타구 어서 가십시다." 세 사람은 언덕을 내려갔다. 김기의 노모가 놀랄까 하여 갑송이는 멀찍이서 걸었고 김기가 노모를 업었다. 김기의 처는 누더기와 사금파리만 남은 세간이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갑송이가 인도하는 마을에는 집도 있고 땅도 있다 하여 아이들만 들쳐업고 뒤를 따랐다. 갑송이는 만동이네 집에 들러 일꾼을 내어 들 것을 만들어 김기 노모를 편히 모신 뒤에 구월산으로 오르지 않고 산아래를 돌아 수렛고개의 토막으로..

장길산 2권 (22)

"나물을 뜯으려도 기운이 있어야지요. 안방에서 마루를 건너오는데도 한식경이 걸린 듯하오. 뭘 잡수셔야 글두 읽으실 테니 읍내 가서 장이라두 보아오시구려." 하며 그의 처가 보를 던지는데 펴보니 한 묶음의 머리타래였다. 얹은 가체를 즐길 대가의 아낙이 탐내어 사들일 만한 탐스러운 머리카락이었다. 김기는 별반 감동도 없이 수건을 쓴 아내의 머리를 힐끗 올려다 보고 나서 그것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도림골서 읍내까지 시오 리 길을 걸어가는데 흉년의 붉은 해가 중천에 솟아 땅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다. 햇빛만이 붉은 게 아니라 말라서 먼지가 풀썩이는 황톳길은 더욱 붉었다. 그는 간장에 물을 타서 몇모금 들이켜고 나온지라 몸이 허하여 땀은 비 오듯 하였다. 읍내 장거리에 도달했는데 저자는 한산했고 물물교환이 간혹 있..

장길산 2권 (21)

술을 따르던 만동이가 잔이 넘치도록 주전자를 기울인 채로 딱하다는 듯이 입맛을 연신 다셨다. "길산이 성님은 아마 제 심정을 아셨을 겁니다. 성님은 다 좋은데 그놈의 의심하는 버릇은 아직두 못 버리셨구려." "의심이 아니야. 풀떼기 먹던 자가 이밥 먹으면 우선 뒷간 다니기가 수월하여지고, 뒷간 다니기가 편해지면 세상살이두 편해지구, 그러면은 관아에 발길이 닿는 법이다. 네 이 고을 아전붙이들 하구두 오락가락 하렷다." 만동이는 역시 입맛을 한참이나 다시더니, "성님 제게두 꾀가 있구, 세상 사는 이치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성님을 길가에서 만나 반가워한 것은 물론 옛 의리도 의리려니와 제게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소이다. 제 말씀을 듣고 나서두 의심이 가신다면 당장에 제 집에서 나가셔두 붙들지 않겠..

장길산 2권 (20)

그 애처로운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옥여는 여러번 한숨을 내쉬었고, 감동이는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졌으며 무뚝뚝한 갑송이도 연신 헛기침을 했었다. 갑송이는 타관에서 노숙하던 밤의 쓸쓸함을 잘 알고 있던 광대였으므로, 더욱 도화와 버들쇠의 얘기가 가련하게 들렸던 것이었다. 옥여스님이 입을 떼었다. "그래 그 도화라는 아이가 지금도 여기 있다는 말인가?" 모가비 임가는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도화는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버렸지요. 저러다가는 아예 밥사당이 되어벌릴 모양입니다." "짝을 맞춰주지 그러나?" "마음이 잡히지 않았습죠. 이 겨울이 지나 다시 출행하게 되면 좀 달라지겠지요." 마감동이가 불쑥 물었다. "도화가 그런 마음씨라면 얼굴은 제법 절색이오?" 임가가 빙그레 웃..

장길산 2권 (19)

"저두 그런 것 좀 가르쳐주시우." "먼저 사람을 활인 해내는 법을 알면 사람의 사법두 알게 되는 것인데, 너는 아직 활인할 생각이 없는 놈이니 사람 목숨의 중함을 먼저 깨우쳐야겠다." 곁에서 묵상을 하듯 꼿꼿이 앉아서 듣고만 있던 옥녀가 풍열스님을 향하여 물었다. "스님, 아까 이 사람과 소승이 대련을 할 적에 어찌하여 제가 졌다구 말씀하셨습니까?" "음, 너는 삼 년 동안이나 여기서 무예를 익혔다. 내가 보았을 적에 갑송이는 병장기 한번 잡아보지 않은 천래의 역사일 뿐이었다. 허나 그 무예의 자질에 있어서 옥여는 갑송이를 당할 수 없더구나. 갑송이는 막는 것과 찌르는 것 모든 동작이 몸에 붙어 있어서 마치 손가락이 가까이 가면 저절로 감겨지는 눈꺼풀과 같고 물 것이 깨물면 날아가 때리는 손바닥과 같더..

장길산 2권 (18)

감동이와 갑송이가 대번에 달려들 기세로 벌려 서는데, 승려가 한걸음 물러나며 손을 쳐들었다. "내가 한마디 외치면 지금 선방에 들어 수도중인 대중이 모두 병장기를 들구 나와서 손님들을 족칠 테니,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외다. 그러지 말구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칠성암 아래 우리 수련장이 있으니 거기서 한판 얼릅시다." "멱 따는 소릴 내지르려무나. 한꺼번에 모가지를 비틀어놓을 테니까." "좋다. 그리루 가지." 갑송이는 당장 싸움을 벌일 기세였지만, 마감동이가 즉시 찬성하였다. 그들이 대웅전 앞마당을 지나는데, 어느 틈에 보살 여인이 전했는지 선방에 남아 참선중이던 승려들 십여 명이 하나 둘씩 몰려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마당으로 내려오지는 않고 웅기중기 둘러서서 내려다볼 뿐이었다. 갑송이가 그들을 향하..

장길산 2권 (17)

"아니우. 서루 소 닭 보듯이 모른 체하는 게 낫지요. 여태껏 그래왔는걸." "하여간에 김기하구 의논해서 월정사를 어찌할지 결정해야지. 서루 친척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쪽을 끈으루 해서 토포군이 들이치면 우린 꼼짝없을 게야. 모조리 죽여버리든지..." 갑송이는 사납게 눈알을 부릅떴으나, 마감동은 싱긋이 웃었다. "흥... 제 동네에서 인심 잃은 놈 잘되는 거 봤어? 월정사 일은 내게 맡기라구." 그들은 졸개들이 해 올린 늦은 저녁으로 요기를 하고 나서 다시 산줄기를 타고 내고개를 지나 구월산 연봉을 타넘었다. 밤새껏 산길을 오르내려 사십리 길을 걸어 된목이골에 당도하니 날이 샐 무렵이었다. 자고 있던 오만석이와 김기가 마중을 나왔고, 먼저 도착하여 노숙을 하던 광대들도 모두 깨어 일어났다. 부녀자들은 ..

장길산 2권 (16)

김기가 방자하게 상대방을 우롱하였으나 지방 수령은 조정의 권위있는 자에 줄이 있는 이 낯선 손님에게 그의 관운이 걸려 있는지라, 아첨이 실로 노골적이었다. 밤이 이슥하여 다담상은 다시 바뀌고 기생들의 춤과 소리도 여러 차례 돌아갔는데, 문득 마당에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무심코 문을 열고 내다보던 기생이 질겁을 하여 외쳤다. "에그 웬 사람들이 마당에 가득 찼네." 사또가 술잔을 내려놓고 따라 일어서려는데, 기다리고 앉았던 김기가 품안에서 두어 뼘짜리의 날카로운 비수를 뽑아 그의 뒷덜미에 갖다 댔다. "꿈쩍 말아라..." "에...? 무, 무슨 짓요?" 사또는 상머리에 두 손을 얹은 채 벌벌 떨고 있었으며, 기생년들은 방구석에 한데 몰려 서서 고개를 처박았다. "잘 모셨소이까?" 밖에서 우렁우렁하는 ..

장길산 2권 (15)

"힘 따위야 나 혼자서도 이 집 기둥뿌리를 뽑아 던질 수가 있소이다. 댁네의 궁량을 빌리잔 얘기우." 선비는 혼자 중얼거렸다. "위로 임금에 충성하고 아래로 백성을 보살피는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서 도적이 된다..." "그거 다 책에만 있는 소리지, 실행이 없는 세상이우. 오히려 우릴 가르쳐서 그런 일을 행하느니만 같지 못하겠수. 내키지 않으면 그만두시오." "우선 생각해볼 여유를 주시겠소? 집에 노모도 계시고 처자가 딸렸으니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닌 듯하오." 갑송이가 낮고 강한 어조로 다짐을 했다. "우리가 나눈 얘기를 혼자서만 새기시오. 아무래두 봉산까지는 함께 가야 할 터이니..." "여부가 있겠소. 당신이 나를 살렸는데, 내 어찌 그런 의리를 배신 할 수가 있겠소." "우리 작당하기로 결정이 되..

장길산 2권 (14)

"얼핏 들으니 양반들게 실수한 우리 집 차인의 일로 오신 모양이군요. 그런 일이라면 낮에 사람 한분을 보내어도 이쪽에서 예의를 갖추어 사과드리고 관가의 벌을 기다리게 할 터인데 무슨 역적의 집이라고 아닌 밤중에 군사를 풀고 횃불을 밝히고 집뒤짐을 하니 이것이 유수나리의 지시란 말입니까? 사또께서 부임하실 적에 비용을 우리네 상단에서 댔고, 지금도 적지 않은 봉물을 한양으로 보내드리고 있는 줄 압니다. 아무리 관장과 백성의 우의라지만 인정이 있는 터인데 이런 의리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내 아버님을 대신하여 사또께 하소하여 만약 지시가 없었다면, 부장께서 경을 치도록 할 테야요." "허허, 그 처자 말씨 한번 고약스럽게 하는구나." 귀례의 세찬 기세에 기가 죽은 부장은 그렇게 입속으로 중얼거리고서 박대근이..

장길산 2권 (13)

박대근이 잠깐 뜸을 들이듯 학선이를 건너다보았다. 학선이도 송도서 웬만한 오입쟁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건달이었다. 원래가 한양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대갓집 통인 노릇을 하다가 판서 댁에서 겸인 노릇을 하더니, 워낙에 투전을 좋아하여 판서가 외임 나갈 때 빌렸던 호조돈 삼백 냥을 모조리 날려버리게 되었었다. 하는 수 없이 내킨 김이라고 다시 오백 냥을 빼돌려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위인이 엉뚱하고 배포가 있는데다 영리하여서, 가끔 제 부하 몇 명을 거느리고 지방으로 나다니면서 어사또 흉내를 내는데 제법 그럴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한바퀴 돌아올 적이면 많은 봉물을 벌어서 가지고 왔고 남의 청탁까지 해결하여 오는 수도 있었다. 박대근이는 진작부터 이러한 학선이의 행각을 들어왔고, 딴엔 쓸모가 있을 녀석이라고..

장길산 2권 (12)

제3장 비증비욕 송상 배대인네 집은 남산 아래 있었는데 깊은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아흔 간이 넘는 대가였다. 배대인은 아들 하나를 두고 딸을 셋이나 낳았는데 그 귀한 아들마저 배냇병신이었다. 장성하여 이십세가 넘었건만 아직도 징징 울며 보채고 옷에 멋대로 방분하는 바보였고 가족들은 배대인이 늘그말에 아들을 보겠다고 산삼을 많이 먹어서 그리 되었다고 말들을 하였다. 위로 두 딸은 같은 상인 신분의 부잣집에 시집을 보냈고 이제 십팔세로 접어든 막내딸이 후원 별당을 지키고 있었다. 세 딸 중에서도 막내는 영리하고 정숙한데다가 특히 배대인이 귀여워하게 된 것은 이재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십육세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배대인 행상단에 차인으로 다니는 자가 있었는데 마누라는 일찍부터 배대인네를 드나들며 ..

장길산 2권 (11)

그녀는 마을을 지나 송림 사이를 헤맨 끝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로 지어진 사자암을 찾아냈다. 누구 주승에게 허통을 넣을 것도 없이 승려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마침 부엌 봉당에 질펀히 앉아서 군불을 때고 있는 중이었다. 불빛이 어른거리는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불승은 몹시 외로워보였다. "스님." 묘옥이 찾았으나 그는 여전히 아궁이 속의 불빛에 눈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스님." "무슨 일인지 말씀하시오." 승려는 여전히 아궁이를 향한 채로 조용히 말했다. "기도를 드려줍시사구 찾아뵈었습니다. 시주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승려가 고개를 돌려 묘옥을 돌아보았다. "나는 혼자 공부하는 행자라서 염블은 폐하고 있소이다. 암자를 찾지 마시고 수양산의 큰 절루 찾아가보시지요."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저는..

장길산 2권 (10)

선흥이 다시 내달으며 달근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자 그는 뒤로 넘어지듯하다가 팔랑개비처럼 재주를 팔딱 넘으면서 멀찌이 물러섰다. "싸움하겠다더니 다람쥐처럼 도망만 다니면 젤인가?" 선흥이 투덜대면서 아예 잡을 생각도 않고 코를 풀더니 둔덕 위로 슬슬 올라가는 것이었다. "쳇, 이따위 싱거운 싸움질은 못하겠네." 이때 뒤로부터 달려온 달근이가 뛰어오르면서 선흥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꺾으려고 힘을 썼다. 힘은 썼으나 선흥이 기운에는 당할 상대가 없는지라 한번 손을 뻗쳐 달근이의 앞섶을 잡자마자 바싹 끌어 앞으로 메다 꽂았다. 달근이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엉치뼈가 으스러졌겠지만 워낙에 살판에서 곤두질로 익힌 몸매라서 다리를 세워 버티며 일어선 자세였다. 선흥이 잡았던 앞섶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머리 위로 치켜들..

장길산 2권 (9)

바윗덩이를 치우니까 피에 흠뻑 젖은 털보의 발목은 아주 으스러졌는지 너덜대고 있었다. "너희들 달마산 패거리냐?" 사색이 되어 빌고 엎드린 세 도적을 내려다보며 총각이 물었다. "예, 저희는 본시 탑벌 두내리 사는 농투성이들인데 마름에게 빌렸던 땅을 빼앗겨 먹구 살 길이 막막하여 백운산에 들어가 이짓으루 부모처자를 봉양하구 있습지요." 다른 자가 다시 늘어놓았다. "여기 학령이 원래는 저희 백운산에서 나와 지키던 목인데 달마산 아이들이 수 많은 것을 믿구 우릴 밀어냈습니다. 그래 저희는 식전부터 오정 때까지 한둘 지나는 행인의 봇짐뒤지기루 연명하구 있습니다." "백운산에 너희 같은 놈들이 몇이나 되니?" "백운산엔 저희말구 너덧 명 있을 뿐이고, 그보다는 불타산 천불사 근처에 도망한 종놈들이 패를 짠 천..

장길산 2권 (8)

"아직 꼼짝 마시우. 다시 올지두 모르니까." 역시 다른 자들이 다시 한번 들러서 살펴보고는 다짐을 두었다. "나중에라두 여길 찾아오면 잘 꼬드겨서 붙잡아놔, 알겠지." "글세 알았다니까. 헌데 무슨 일이냐구. 누가 겁간이라두 하러 들어왔어?" "입 닥쳐 이놈아. 뉘집에 대구 그따위 말버릇이야." "아니 이놈이..." "그만 가세. 미안하오, 영감." 하인배들이 사라지자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쓸개 빠진 놈들 같으니, 색시 어서 나오게." 묘옥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화들짝 놀랐다. 그의 머리 위에서 짐들이 내려지고 묘옥은 희미한 등잔불 아래 드러났다. 비록 남장은 했건만 총각처럼 땋아서 두건으로 질끈 동였던 머리가 풀어헤쳐져 있었고, 몰에 젖어 찰싹 달라붙은 옷 위에 부푼 가슴의 윤곽이 드러나 ..

장길산 2권 (7)

묘옥이 적당히 사주를 대어주자 마당쇠는 몇번이나 속으로 중얼중얼 되씹어보고 나서 안으로 사라졌다. 어둑어둑해지자 마당쇠가 다시 나타나 별당이 훤하도록 등을 걸고 방안에는 밀초 한쌍을 밝혀놓았다. 계집아이 둘이서 떡벌어진 다담상을 내오는데 갈비와 제육에 탕반이 곁들였고 각종 볶음이며 어회 등속과 산나물에 전과 과일까지 있어 어느 재상의 생일 잔치를 만난 듯하였다. 기명이 깨끗하고 음식이 정갈하여 묘옥을 감히 수저를 대기가 황홀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하루 종일을 험산준령을 넘어왔으니 시장기에 쑥개떡을 내어 주어도 꿀맛일 텐데 다담을 대하니 속이 느끼하여 몇점 집어 먹는 중에 벌써 배가 부른 듯하였다. 뒤이어 하녀가 생률, 대추, 배, 송이무침 등의 상큼한 안주와 술병을 얹은 소반을 따로 차려다가 상 옆에 밀..

장길산 2권 (6)

묘옥은 아무 정신 없이 타박타박 걸었다. 작은잿말의 밭두렁과 그 너머로 동구에 섰는 노송이 보였으며 어느결에 묘옥의 흐려진 눈앞에 길산의 낯익은 걸음걸이가 나타났다. 달빛을 온몸에 받으며 길산은 다가오고 있는 듯하였는데 묘옥은 뛰는 가슴으로 그를 기다렸다. 다시 제정신이 들었을 때는 아직 훤한 저녁이었고 소나무 밑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묘옥은 울음을 터뜨렸다. 묘옥이 자기 설움에 겨워 마음껏 울고 난 뒤에 다시 길산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처형되기 전에 감영 옥으로 찾아가 손이라도 잡아보아야만 원이 없을 듯하였다. 제 몸에 찍혀 있는 연비의 또렷한 글자, 정표를 해준 사내, 거친 세상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마음까지 바치었던 유일한 남자, 그러나 어쩐지 ..

장길산 2권 (5)

길산이 할멈에게서 밥과 소채가 들어 있는 바가지를 넘겨받고 첫술을 뜨는데, 할멈이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것이었다. "어째 그러우?" "아무래두 우리 아이가 오래 못 살 것 같소."하며 할멈은 한숨을 쉬었다. "몹쓸 병이 들었소. 며칠 전부터 몸을 잘 쓰지 못하더니 실성기를 보입니다. 음식을 배앝는 고로 죽을 주면 넘길까 하였으나 바닥에 자꾸 쏟아버립디다. 고사나 지내줘야겠어요. 아마 몹쓸 망나니귀신이 씐 모양이지." "그게 다 밖에 나가면 나을 병이우." "옥송이나 빨리 열려서 차라리 귀양으루 내쳤으면 제정신을 찾을 텐데... 아무래도 세상엔 벌써 인연이 끊겼나 보오." 노파는 창살 속의 어둠을 향해 젖은 눈으로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아들이 죽으면 나두 아마 살지 못할 거외다. 내 들어 있는..

장길산 2권 (4)

우대용이는 저도 모르게 목구멍 속에서 웃음이 솟아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있었다. 육신이란 무엇인가, 목숨은 또한 무엇이냐, 오랜 세월을 피맛을 보고 해묵어온 작두칼이 그의 손안에서 무당의 신대처럼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에이잇! 히히히..." 옥졸들이 사형수를 감참관 앞에 꿇어앉혔다. 감참관은 감영의 판결이 떨어진 문서를 펼치고 간단한 집행 심문을 하는데 이름과 관향을 확인하고 판결 내용이 틀림없는가를 옥사장에 묻고 나서 거행을 명하였다. 북이 천천히 느린 박자로 두드려지고 있었다. 봉산 부엉이는 양손에 화살 두 대를 잡고 껑충껑충 뛰면서 형장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북소리가 크게 한번 들리자 무릎 꿇린 죄수에게로 부엉이가 달려들었다. 화살로 사형수의 양쪽 귀를 꿰는 ..

장길산 2권 (3)

다시 주위가 조용해지고 달이 창살 틈으로 나타나자 옥내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나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한 칸인 듯하더니 이어지는 노래에 화답하고 끊기면 곧 뒤를 이어서 사방에서 노래가 일어났다. 노래가 끊긴 곳에서는 푸념하는 중얼거림과 울음소리가 시작되었는데, "아이구 하늘이여 죄없는 내가 죽어지면 부모님은 어디 가 의지하며 처자는 뉘게로 간단 말이오." "이놈의 세상아, 한많은 내 육신이 무슨 쇠로 만들어서 달리고 두드리고 식힘이 이다지도 대단하냐." "어마님 날더러 어찌하라구 이제는 뭘 바라구 살라구 애통해 돌아가신단 말요. 어마님 시신 하나 수습하지 못하구... 눈은 감으셨습니까요." "에이 이년아 네년이 후살이 갔다구 내가 서러워할 줄 아느냐, 이 찢을 년아 발길 년아." "배고파 죽겠다. 나 밥..

장길산 2권 (2)

"나는 원래 본관이 배천이고 평산서 사령질을 다니다가 검수역말로 나아가 마방직을 했던 사람이외다. 하루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부담마를 정돈하고 땅거미질 무렵에 술이나 한잔 마시려고 역참거리를 내려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한줄금 비치더란 말이오. 그래 비를 피하여 잠시 어느 민가의 처마 끝에 무료히 서 있었수.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로 아랫도리가 금방 젖어버렸지요. 그냥 비를 맞으며 걸을까 하고 막 처마밑을 나서려는데 길가 퇴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계집의 반쯤 가리운 얼굴이 나온단 말입니다. 여보셔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안일 좀 도와주구 가시지요. 목소리가 청아하고 손짓이 은근하여 나두 모르는 새 겹대문 안을 들어섰지요. 일이란 별것이 아니고 광에 있는 쌀섬을 져다 빈 뒤주에다 쏟아 넣어달란 것입니다..

장길산 2권 (1)

장길산 2권 제2장 수초 옥은 객사 건너편에 있었는데, 원래 영에서 군기고로 쓰던 것을 개축하여 옥으로 바꾼 건물이었다. 일자로 길게 지어진 두 채의 기와집이 마주보고 섰는데, 사방에 돌담을 쌓아 막아놓고 네 귀퉁이에 옥리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 죄수들의 가족들이 감옥 부근 일가에 들어 밥을 붙이면서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옥전거리는 언제나 음식장수들이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관에서 죄수에게 먹일 양곡을 내는 법이 없으니 가족이 없는 죄수들은 동료나 옥리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 음식으로 겨우 연명하다가 굶어서 죽는 수밖에 없었다. 좌옥 우옥이 있는데 우옥은 좀도둑이나 부녀자들이 갇힌 곳이요, 좌옥은 전과자와 강도와 살인자들의 옥이었다. 창고로 쓰이던 일자집의 앞쪽 벽을 완전히 허물고 굵은 나무 칸막이로 막았..

장길산 1권 (35, 完)

나졸들이 득달같이 매를 들어 길산의 차꼬에 묶인 무릎을 때렸다. 길산은 매를 맞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 일당들이 모두 몇이었더냐?" "소인 혼자였소." "저놈...... 거짓 소리를 하는구나. 신가의 말에 의하면 여러 놈이라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로 속이려느냐. 그놈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태형을 멈추지 마라." 다시 뭇매가 퍼부어졌다. 국문이 계속되는 중에 앓아 누운 신복동이가 올린 자술서가 길청에 들어왔고 길산이 더이상 발명할 길은 없게 되었다. "네놈과 함께 신가네 규방을 침입한 자가 누구냐?" "저자에서 사귄 사람이니 얼굴을 보면 알겠으되 이름은 모르오." "신가네 장정 하나이 증언하기를 너희가 송화 무더리 장터에서도 행악을 저질렀을 때 함께 있었다 한다. 이름을 대지 ..